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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흉노와 신라
 작성자 : 관리자 2020.01.30 18:42:29, 조회 160 

내물왕 대에 이르러 갑작스러운 발전을 이룩한 신라, 그것이 북방 유목민족 흉노의 유입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들은 어떤 경로로 신라에 온 것일까?
폴로스막 러시아팀 흉노 무덤 발굴대장은 흉노가 어떤 경로로 신라로 이동했는지에 대한 단서를 낙랑에서 찾는다. 그는 낙랑군 출토 유물이 흉노의 것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국보로 지정된 낙랑 출토 금제 허리띠 장식이다. 금을 미세하게 세공한 누금기법으로 만든 이 금제 장식은 세공의 정교함과 예술적인 조형미가 조화를 이루는 걸작품이다. 신라시대에도 누금기법을 사용한 장신구들을 만들었다. 흥미롭게도 이 누금기법을 사용한 유물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 지대에서 발견된다. 유목민족의 전형적인 지표유물인 것이다. 낙랑 ...지역에서 출토된 동물 문양의 장신구는 몽골 흉노 무덤에서 발견된 장신구와 거의 흡사하다.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그 후 유민들은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흉노가 신라 왕실의 조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많은 이들이 정서적으로 거부감을 보인다. 북방 유목민들이 야만족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연 약탈을 일삼던 잔인한 야만족이었을까?
중국인들은 늘 유목민족을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 흉노라는 명칭 자체도 노비를 의미한다. 드넓은 초원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유목민족, 자신의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까닭에 많은 부분이 비밀에 쌓여 있다. 유목민족은 고대와 중세시대에 중국, 인도, 페르시아, 유럽 문명의 가교 역할을 했다.
몽골의 고고학 연구소 전시실에는 재미있는 유물이 있다. 2006년 노인울라 고분군에서 발굴된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모습이 새겨진 은장식이다. 그리스로마 문명의 것임이 거의 확실한 은장식품이 흉노에게 전파된 것은 이미 2000년 전 동서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크로드의 진정한 개척자는 바로 유목민들이었다. 동서 교역을 장악한 그들은 동양과 서양 모두에게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황남대총에서는 흑해 연안에서 제작된 유리병인 로만 글라스가 출토되기도 했다. 신라시대에 로마 양식의 유리제품이 들어올 정도였다면 고대인들의 세계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넓었던 것이 분명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나라는 516국의 호족 정권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유목민족의 나라였다. 유목민족은 문화의 전달자로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1000년에 걸쳐 조성된 둔황석굴의 놀라운 예술 작품들 또한 그들이 남긴 것이다. 이렇게 많은 유적들이 유목민족이 고유한 문화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게 편견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또 중국에 의해서 그동안 평가 절하되었던 북방 유목민족의 역사를 이제는 복원해야 할 때이다.
이제 신라 왕족이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하던 흉노족의 후예라는 가능성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었다. 흉노는 동서양 교류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민족이며, 그들 자신의 고유한 문화도 간직하고 있었다. 부당한 평가를 받았던 이들의 자취를 복원하는 일은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우리의 뿌리를 되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금태조의 아들 김올출
19083세의 나이에 황위에 오른 선통제는 중국 역사상 최후의 황제였다. 중국혁명 이후 친일전범자로 법정에 선 그의 이름은 아이신 줘러 푸이(愛新覺羅溥儀), 즉 애신각라는 청황실의 성()이다. 신라가 들어 있는 이 성씨 속에는 한반도와 만주, 중국, 동북아시아를 꿰뚫는 역사의 비밀이 숨어 있다.
여진족은 두 차례에 걸쳐 중국 땅에 제국을 건설했다. 1115년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웠고, 1616년 누루하치가 후금, 즉 훗날의 청나라를 세웠다. 북방의 오랑캐 정도로만 알고 있던 여진족 또는 만주족은 우리 역사의 숨겨진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지닌 민족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 비밀은 무엇일까?
1115년 아골타는 곧바로 금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다. 아골타는 1125년 아예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한족의 북방 저지선인 만리장성을 넘어 바람처럼 남진한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한족의 심장부인 중원을 이민족에게 내주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이 한족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정강지변이다. 이때부터 북방 유목민족은 중원의 통치자가 되었고, 그들은 북경을 새로운 정치 통치의 중심지로 닦아나갔다.
한족의 심장부를 점령한 아골타는 금나라를 건국한 후 황실 성을 완안씨로 정했다. 그러므로 금의 태조 아골타의 정식 이름은 완안아골타이다. 송을 정벌할 당시 금나라 군부의 핵심 인물은 아고타의 넷째 아들 완안올출이었다. 완안올출의 활약으로 송나라는 초토화되고 결국 황제가 포로가 되고 말았다. 아골타의 넷째 아들 완안올출을 진우슈(金兀朮) 즉 우리말로 김올출이라고 부른다. 여진족의 후예를 왜 진우슈라고 부르는 것일까?
중국 서부 깊숙한 곳 간쑤성의 경안현에는 완안 성씨의 여진족들이 동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이들은 금태조 아골타의 넷째 아들 완안올출, 즉 진올출을 직계 조상으로 삼는다. 이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은 1140년대 완안올출의 아들이 금황실 내부 정쟁에 휘말려 살해된 뒤이다.
명절이면 전 부족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완안씨 사당에는 역대 황제와 자신들의 선조인 완안올출의 비가 있다. 완안올출의 비에도 역시 김올출이라는 이름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왜 자신들 선조의 성을 완안씨라 하지 않고 김씨라고 부를까? 학자들은 김이라는 성이 금나라와 관련이 있다는 추정만 할 뿐이다.
후손들도 오래전부터 그냥 김올출이라고 불러왔을 뿐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만주에서 간쑤성까지의 거리만큼이나 기나긴 역사의 비밀이 쇠 금자에 담겨 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김씨 성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만 중국에서는 대단히 드문 성씨라는 사실이다.
강화도 마니산은 우리 민족의 뿌리와 정기를 숭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지와도 같다. 이 마니산에는 커발한 개천각이 있는데 민족운동가였던 이유립 선생이 설립해 24명의 우리나라 위인을모신 사당이다. 환웅천제, 치우천왕 단군왕검, 고주몽, 대조영 등을 모시고 봄 가을 두 번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곳에는 금태조 아골타의 영정이 있다. 여진족인 아골타가 왜 우리나라 위인들과 나란히 모셔져 있는 것이 궁금하다.

< 중국을 제패한 신라의 후손 >
중국 베이징의 수도도서관 고문헌 자료실에는 고서(古書)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곳에는 금황실의 가계를 기록한 송막기문(松漠記聞)이라는 책이 있다. 여진족 금나라에 쫓기던 송나라는 양쯔 강을 건너 항저우로 피신한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간 황제의 귀환을 위해 1129년 금나라에 홍호를 파견하였다. 송막기문은 남송의 홍호가 10년 동안 금나라에 머물며 기록한 당대의 생생한 증언이다. 송의 사신 홍호는 여진족 추장은 신라 사람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여진 추장은 신라 사람이다. 女眞酋長乃 新羅人. 이 뿐만이 아니라 여진족은 금나라 정사인 금사(金史)에 자신들의 황실 뿌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놓았다.

금나라 시조는 함보라 불렀는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 이미 60...세 정도였고, 김함보의 형은 아고내인데 그는 불교를 좋아했다. 동생의 뒤를 따라 만주로 오지 않고 고려에 머무르면서 말하기를 후세 자손들이 반드시 서로 만나서 모여 살 때가 있을 것이다. 나는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홀로 김함보는 아우인 김보활리와 함께 만주로 왔다.
형 아고네는 고려에 남고 둘째인 금의 시조와 동생 보할리는 여진으로 왔다. 이 금시조의 8대손이 태조 아골타이다. 고려에서 온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였다. (금사본기) 1, 세기

신라와 고려인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금사금사본기두 사서 모두 금나라의 선조가 한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골타는 1068년생이다. 8대조 함보로 거슬러 가면 대략 900년대 초반이 된다. 신라 말, 고려 초의 격동하는 정세 속에서 한 무리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동했던 것이다. 흠정만주원류고1600년대 초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이다. 이 책에도 금나라의 국호에 대한 설명이 있다.(사서를 고찰하건데 신라왕 김씨 성이 수십 세를 전하였고, 금이 신라로부터 온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금국의 이름 또한 마땅히 이를 취한 것이다.)

금은 신라 김씨에서 유래했고 국호도 이를 딴 것이며 그 외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단호하게 정리하고 있다. 정사에 나온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이 분명하다. 북만주에서 바람처럼 일어나 중국 대륙을 제패한 여진족의 영웅 아골타. 그의 8대조는 고려 초에 한반도에서 넘어간 사람이었다.

고려, 발해는 여진의 일가인가?
110712월 윤관이 지휘하는 고려군 17만은 여진정벌에 나섰다. 고려군의 상대는 바로 김함보의 후손들이었다. 김함보가 여진족의 지도자가 된 지 150여년 후 팽창하던 여진족은 함경도 인근에서 고려와 잦은 충돌을 벌였다. 윤관은 이 전쟁에서 동북9성을 확보하고 최북단인 공험진에 국경비를 세웠다. 그렇다면 고려의 북쪽 국경선인 공험진은 어디였을까?
윤관이 실제 국경비를 세운 공험진은 함경도 종성에서 북으로 700리 지점이다. 세종 때 실측한 조선국회도를 보더라도 공험진은 함경북도 종성의 북쪽이고, 두만강 너머에 위치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조선국회도북관유적도등을 종합해볼 때 공험진은 현재 연길시로 추정된다. 여진은 자신들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였던 간도 지방을 고려에 빼앗긴 것이다. 다급해진 여진은 고려에 동북9성을 돌려달라는 사신을 보냈다. 고려사에는 그 기록이 있다.

일찍이 우리 선조가 대방 즉 고려로부터 나왔으니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옛 땅을 돌려주시면 기왓장 한 장 던지지 않겠습니다. -예종4(1109) 6-

기록 속에서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부르고 있다. 1115년 금황제가 된 아골타도 여진과 고려는 형제지간이고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지칭한다.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겨 조심스럽게 섬겨왔고, - 예종12-
금나라에게 고려는 선조들이 나온 부모의 나라였던 것이다. 중국의 다롄대학 왕우량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고려와 여진 사이의 전쟁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습니다. 그들은 거란이나 몽고와 다릅니다. 거란과 몽고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민족공동체였습니다. 그들에게 혈연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별다른 유대관계가 없습니다. 이에 비해 여진족과 한반도의 신라인, 즉 이후 고려인은 민족공동체인 것입니다.”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건국했던 발해는 926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게 멸망했다. 나라를 잃은 300만 발해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긴 광복운동을 벌였다. 이때 발해인과 여진족 사이에는 반거란이라는 연대가 형성되었다. 어떻게 발해인과 여진족 사이에 연대가 이루어진 것일까? 그 이유가 금사에 잘 나타나 있다.
여진과 발해인은 원래 한집안이다. 女眞渤海同 本一家.
아골타는 거란에 맞서 봉기할 때 여진과 발해는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로 한집안임을 주장해 발해 유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다. 여진과 발해 사람들 모두 두 민족 사이에 친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구호가 쉽게 공유된 것이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은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한족에게는 변방에 불과했다. 여진족은 중원을 장악한 이후 대규모 신도시를 만들었다. 수많은 발해인들이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을 형성했다. 발해인들에 대한 금나라의 신뢰는 단순한 혈연적인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발해인들은 이미 대제국을 건설하고, 운영해본 경험이 축적돼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이제 막 생겨난 금의 국가체계를 안정시키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이런 필요성에 따라 금은 발해인들을 중용해서 국가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했던 것이다. 이로써 발해인들은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과 왕비족으로 자리 잡았다. 금나라는 발해인과 여진족 연합 정권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금황실의 선조는 신라 출신이었고, 국가 지배층은 발해 유민이었다. 그리고 고려와의 우호적인 관계로 여진족 금나라는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 동북공정과 애신각라 >
만주와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금나라는 또 다른 북방 민족인 몽골족의 원나라에 중원을 내주고 만주로 사라졌다. 하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1616년 후금을 세워 명을 무너뜨리고 다시 중국 대륙을 통치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다. 그렇다면 청을 건국한 누루하치는 누구일까? 또 청 황실의 성이었던 애신각라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청황실의 성은 아이신 줘러이다. 그런데 그 후손의 성이 김씨인 것이다. 청나라의 역사서 만주실록에는 청황실과 만주족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나온다. 애신각라 그 뜻은 겨레, , 씨족 등과 같고 성씨에 붙는다. 즉 만주어 애신각라를 한자로 바꾸면 금()이 되는 것이다. 신라의 왕족 성인 경주 김씨와 신라인의 후예 금황실, ...금나라의 후신인 청황실은 모두 금을 뜻하는 김씨들이었다.
송나라가 멸망한 후 양쯔 강 너머에 남송이 들어섰지만 금나라군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고, 남송은 위기에 빠졌다. 이때 금군을 막아낸 사람이 바로 악비 장군으로 군사를 이끌고 금군을 저지하였다. 산은 흔들어도 악비의 군사는 흔들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군대는 용맹했고 전장에서 승리했다. 그 이후 악비 장군은 한족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았다. 900년 가까이 악비는 민족지광(民族之光)으로 불리며 한족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02년 중국은 동북공정을 시작하면서 악비가 더 이상 민족 영웅이 아니라는 고등중학교 역사대강을 발표한다. 중국 당국이 갑자기 자기 민족 영웅 악비를 격하시키는 이유는 간단하다. 악비를 영웅으로 삼으면 수천 년 여진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편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안을 중심으로 한 황허 문명권에서 일어난 한족들은 전통적으로 한족 이외의 민족들을 오랑캐로 여겨왔다. 그런데 만주 역사를 중국의 것으로 꾸미려는 동북공정의 역사관에서는 민족 영웅 악비가 장애물이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금태조 아골타의 시조가 신라 후손이라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국의 야심찬 동북공정 역사관을 근본부터 흔드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렇게 역사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사실들도 모르고 지냈다. 우리의 의식 속에 한족은 우수하고, 흉노나 여진족은 북방의 오랑캐라고 생각하는 소중화사상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신라와 여진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역사관을 한번쯤 반성해볼 기회로 삼아야 한다.

< 투르크와 고구려 >
투르크(turk),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돌궐(突厥)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북방 유목민족이다. 한때 유라시아 북방 초원을 장악해 거대한 유목제국을 만들었던 돌궐은 그후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로 이름을 바꿔가며 서쪽으로 나아가 지금의 터키에 정착했다.
한반도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그들은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꽤 가까운 사이였다. 특히 고구려와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증거가 5,000킬로미터 떨어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있다.
한때 구소련에 속해 있던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 특유의 이국적 풍취로 가득하다. 주민들은 14세기 중앙아시아를 제패해 대제국을 세웠던 티무르 칸의 후예들이다. 우리 역사와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이 도시에 민족의... 발자취가 남겨져 있다. 지금은 폐허로만 남은 아프라시압 궁전 유적지이다. 우연히 발견되어 1965년부터 10년에 걸쳐 발굴되었다.
유물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벽화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고대의 벽화에 한국에서 온 사신들이 그려져 있다. 벽화의 한쪽에 묘사된 고구려 사신도가 그것이다.
20091019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전문가와 언론을 대상으로 한 발표회가 열렸다.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허락을 얻어 이 벽화를 발굴할 당시에 그린 모사도(模寫圖)가 국내에 들어온 것이다. 동물 가죽 옷을 입고 칼을 찬 인물들이 바로 고구려에서 온 사신들이다. 이들이 고구려 사신이라는 것은 이들이 찬 칼을 통해 알 수 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머리 장식이다. 새 깃털 두 개를 꽂아 놓았다고 하여 조우관(鳥羽冠)이라고 부르는 모자는 이들의 소속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실크로드 미술의 정화인 둔황의 220호 석굴에도 또 다른 고구려 사신도가 남아있다. 이들 역시 조우관을 썼다. 그 외에도 조우관이 고구려 고유의 것임을 알려주는 자료는 많다.
고구려 사신들은 1300여 년 전, 중앙아시아의 초원을 가로지르고 사막을 횡단해 무려 5,000킬로미터의 여정 끝에 사마르칸트에 도착했을 것이다. 서기 650년부터 655년까지 사마르칸트를 지배했던 바르후만 왕의 아프라시압 궁전에는 그의 치세를 기념하기 위해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때 고구려 사신도 그려지게 된 것이다.
고구려 사신들이 그려진 서쪽 벽은 궁전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와 사마르칸트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들이 그곳까지 간 이유는 무엇일까? 오랫동안 벽화를 연구해온 중앙아시아사의 권위자, 상지대 권영필 초빙교수는 이들이 연개소문이 650년 이전에 보낸 사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인들이 연개소문이 보낸 사신이라면 그들의 임무는 도대체 무었이었을까?

<연개소문과 당태종 >
당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주변 유목제국을 제압해 크게 위세를 떨치던 시기, 고구려의 권력자는 연개소문이었다. 독재자로, 뛰어난 장수로 널리 알려진 연개소문이 사마르칸트까지 사신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당고조에 이어 황제에 등극한 당태종 이세민은 내치가 안정되자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 국가에 대한 침략을 준비했다. 630년 당태종은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는데 이는 고구려에게 큰 손실이었다. 그런데 영류왕은 당태종이 힐리가한을 생포한 것을 축하하며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바쳤다. 영류왕과 온건파는 당과의 마찰을 피하는 전략을 선택했던 것이다.
635, 서쪽의 토욕혼을 멸망시킨 당나라는 640년에는 고창국을 점령한다. 이제 남은 것은 고구려뿐이었다. 당나라를 적대시하고 싶지 않은 영류왕의 의도와는 달리 당시 국제 정세는 점점 더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국제 상황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마침내 고구려의 정권을 장악하게 된 연개소문은 필생의 라이벌 당태종과 정면으로 대결을 벌였다.
사실 당시 국제 상황으로 보았을 때 당나라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북방 유목민이었다. 비록 당나라가 군사적으로 제압했다고는 하나 완전히 정복한 상태는 아니었다. 특히 돌궐의 한 부족인 설연타는 고구려의 주요한 동맹 세력이었다. 연개소문은 설연타에 사신과 물자를 보내 동맹을 제의한다. 이 복잡한 대결구도 속에서 동아시아는 요동치고 있었다.
6452,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수도 장안을 떠났다. 수성전에 능한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한 새로운 전술도 개발해두었다. 초반 전세는 당나라의 것이었다.
신성, 건안성, 개모성 등이 차례로 공격받았고 수양제가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요동성마저 무너졌다. 이제 당군은 안시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시성이 함락된다면 수도 평양까지도 위태로웠다. 모든 것이 고구려에게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안시성의 고구려 병사들이 당군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방어해 막아낸 것이다.
안시성에서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한 연개소문은 기막힌 외교 전술을 구사했다. 중원 바로 위 초원지대에 근거지를 둔 유목국가 설연타에 사신을 보내 중원을 침공하도록 사주한 것이다. 설연타는 수비가 느슨해진 중원을 기병을 동원해 공격했다. 안시성이 뜻대로 함락되지 않고 설연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당태종은 철군을 결정한다.
고구려의 기본적인 외교 전략은 북방 민족과 연합해 중국 세력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이런 전통적인 외교 전략을 이용해 다시 한 번 고구려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고구려와 유목제국 >
현재 터키라는 국호는 투르크에서 유래하였다. 중국인들은 투르크를 한자로 음차해 돌궐(突厥)로 표기했다. 돌궐은 6세기 중반부터 8세기 중반까지 북방 초원지대를 장악해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다.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를 알려주는 오래된 증거가 있다. 몽골의 오르콘 강가에서 발견된 돌궐시대의 비문인 궐특근비문이 바로 그것이다. 한자로 돌궐 문자로 기록된 이 비문에는 돌궐의 토문가한의 장례식에 조문을 온 나라들이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 비문에 고구려가 뵈클리(B kli)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돌궐과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 조문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다. 돌궐을 비롯한 서역 여러 나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코가 높고 커 고비인(高鼻人)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문화적 교류도 활발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있다. 607, 수양제가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의 눈 앞에 고구려 사신이 돌궐의 계민가한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침공을 앞두고 돌궐 세력을 무마하러 간 수양제 앞에 고구려 사신이 있었으니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고구려는 은밀히 돌궐과 접촉하여 수나라를 견제하려 했다. 고구려와 돌궐의 연합은 수나라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고구려는 돌궐을 비롯한 북방 유목제국과 정치, 군사, 문화 모든 면에서 활발히 교류하였다. 고구려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다원적 세계를 추구했고, 당은 자국이 중심이 되는 일원적인 질서를 원했다. 고구려에게 있어 유목국가와의 연대는 그들의 다원적 세계관을 구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이들과의 관계는 국가의 존망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당고종의 철군 이유? >
그렇다면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그려진 이 고구려 사신들은 구체적으로 언제 그 먼 곳까지 간 것이며, 정확히 무슨 임무를 띠고 있었을까?
당태종 이세민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당고종은 선대 황제가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복을 기필코 이루리라 마음먹는다. 660,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그 이듬해 또다시 고구려를 대규모로 침략한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당나라를 저지하기 위해서 고구려는에게는 군사동맹의 상대가 절실히 필요했다. 1차 고당전쟁 당시 고구려를 도운 설연타는 당의 침략으로 이미 망한 뒤였고, 그 뒤를 이어 돌궐의 한 부족인 철륵이 새롭게 흥기했다. 아마도 고구려는 철륵과 연합전선을 펼쳐 당나라를 견제하고자 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구려의 외교 역량을 감안한다면, 아프라시압 궁전에 그려진 고구려 사신들이 철륵을 거쳐 사마르칸트까지 갔다고 가정할 수 있다. 사마르칸트는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관문이었으며, 돌궐과 당나라가 대결하는 중앙아시아 최대 요충지였던 것이다. 고구려로서는 측면에서 공격하는 당을 견제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즈음 제2차 고당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당나라군이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장안에 있던 당고종이 여섯 개의 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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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몽골 정부 中자본 차단…광물 등 외국인 투자제한  관리자 2012.06.27 1,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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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몽골에서의 예의  관리자 2012.03.15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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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상징동물 (5)몽골-말  관리자 2012.01.13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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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지혜로운 사람: 몽골  관리자 2011.12.28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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