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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몽골과 맞선 삼별초 항쟁
 작성자 : 관리자 2012.04.25 15:48:01, 조회 1,653 

최이가 조직한 ‘신의군과 좌·우별초’…야별초라 불리기도 남도 농민들의 호응으로 여몽연합군 공격
3년이나 버텨내

진도의 용장산성-둘레가 13㎞에 이르는 산성에는 행궁터가 남아 있다. 이 행궁에는 출입용 계단이 없는데, 탈출
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였다. 건물 자리 12개와 420m에 이르는 토성이 남아 있다.(전남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사적 126호)

제주의 항파두리성-삼별초의 마지막 항전지이며, 사적 396호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의 하나로 내성과 외성
을 흙으로 쌓은 6㎞ 길이의 성이다. 인근에 기념관과 항몽순의비(抗蒙珣義碑) 등이 건립돼 있다.(제주도 애월읍
·지방기념물 제29호)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1977년 발견된 이 문서는 1271년에 삼별초가 일본
정부에 보낸 것이다. 이를 접수한 가마쿠라 막부가 교토의 조정에 보고하면서 3년 전 개경
의 고려정부가 보낸 문서와 비교해 미심쩍은 부분 등을 뽑아 정리해 위 문서를 만들었다.(
일본 동경대 사료편찬소 소장)

 타협한 고려, 타협하지 않은 또다른 고려

 삼별초는 신의군과 좌별초, 우별초를 말하는데, 원래 최이가 조직했다. 당시에 전국에서 도둑떼가 일어나고 농민군이 곳곳에서 저항하자, 개경 경비를 위해 군사들을 뽑아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했다. 주로 밤에 경비를 한 탓으로 야별초라 했다. 최이는 이들을 더 늘려 각지에 파견했는데, 그 수가 불어나 둘로 쪼개 좌·우별초로 편성했다. 이후 강화도로 조정을 옮기고 몽골군과 전쟁을 벌일 때 몽골에 포로로 잡혔던 장정들이 도망쳐 오자, 최이가 몽골군의 사정에 밝은 이들을 신의군(神義軍)으로 편성했다. 이들은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며 무신정권의 사병으로 전락했다. 삼별초는 대몽항쟁 기간에 방호별감의 지휘 아래 수백 명 단위로 출전해 지방군과 농민군을 이끌고 몽골군에 맞서 싸웠지만, 삼별초의 주력부대는 강화도에서 무신정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1258년(고종 45)에 최의가 왕정복구를 꾀한 문신 유경(柳璥)과 무신 김준(俊)에 의해 살해되자 정권은 국왕에게 돌아가고 몽골에 대한 강화가 결정됐다. 이듬해에 태자 전(원종)이 몽골로 가서 강화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1268년 임연이 김준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강화에 대한 반대가 노골화됐으나, 그가 병으로 죽고 그의 아들 임유무마저 1년 뒤 송송례(宋松禮)에게 살해되면서 무신 정권은 100년 만에 몰락했다. 이 해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를 결정하고 몽골에 대한 항쟁을 포기하고 말았다. 친몽정책을 표방한 원종은 1270년 5월 개경환도를 추진하면서 삼별초의 명부를 빼앗아 병권을 장악하려 했다. 조정에서 삼별초 지휘관들의 명부(名簿)를 조사하자, 무신정권의 사병 노릇을 했던 삼별초 지휘관들은 불안에 떨었다. 삼별초 명부가 넘어갔다는 것은 몽골군에 저항한 자신들의 공적은 고사하고, 몽골군의 대대적인 숙청이 뒤따른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몽골군도 자신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의 전투력을 무력화시키고자 했다. 그 사이 39년 동안 항쟁의 거점이었던 강화 도성의 관리와 그의 가족들, 군인과 백성들은 조정의 개경 환도가 결정되자, 짐을 싸고 배를 마련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삼별초를 해산한다는 원종의 조서가 발표됐지만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270년 6월 1일에 삼별초의 지휘자인 배중손(裵仲孫)과 노영희(泳禧)는 삼별초의 해산 명령에 불복해 종실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반몽 항쟁을 선언하며 또다른 정부를 세웠다. 배중손 등은 “오랑캐 군사들이 대거 밀려와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은 구정(毬庭)으로 모이라”고 선동했다. 잠깐 동안 넓은 구정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나, 배중손 등의 선동에 속은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앞을 다퉈 흩어졌다. 사람들은 사방으로 달아나 배를 타고 육지로 향했다. 삼별초 군사들이 바닷가로 돌아다니면서 “배에서 내리지 않는 사람은 모조리 베어 죽이겠다”며 활시위를 당겼다. 삼별초군은 새 정부에 반항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색출해 죽였다. 삼별초의 지휘관들은 사흘 동안 강화 도성을 지켰으나, 결국 3일 후 배 1000척을 모아 재물과 군사와 가족을 싣고 진도로 향했다.
 
 반란이냐, 항쟁이냐?

 삼별초가 근거지를 진도로 옮기자 고려 정부는 당황했다. 몽골군은 본래 해전에 약했고 고려 정부군은 삼별초에 대항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삼별초는 순식간에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곧 전라도 일대를 제압했다. 완도의 송징, 남해도의 유존혁 등이 그 예다. 남해안과 내륙 지역은 물산이 풍부한 지대이며 이들 물산의 운송로를 포함하고 있어서 세금이 올라오지 않는 개경 정부 측의 타격은 심각했다. “삼별초군 모두 배를 타고 기치를 수없이 펼쳐 꽂았는데, 징·북소리가 바다를 끓일 정도로 요란했다”고 할 정도였다. 진도를 거점으로 한 삼별초는 탐라(제주)를 배후 거점으로 삼고, 동시에 몽골의 압력에 대응하는 방편으로 일본과의 공동전선 구축을 시도했다.

 진도의 삼별초군은 여러 차례 여몽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개경정부를 위협했다. 고려 조정은 1270년 9월 김방경을 전라도추토사로 임명해 몽골의 원수 아해와 함께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지만, 그때마다 취약한 해군력으로는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자 몽골은 1271년 고려인인 홍다구를 새로운 지휘관으로 임명해 고려 정부군과 함께 진도에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화약무기 등 신무기까지 동원된 이 전투에서 삼별초는 패배했고 배중손과 승화후 왕 온도 죽음을 맞았다. 겨우 살아남은 삼별초군은 김통정을 새 지휘관으로 추대해 탐라로 건너가 항전을 지속했다. 그러자 여몽연합군은 1273년 2월 함선 160척 수륙군 1만 명을 동원해 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김통정이 4월에 전사하고, 잔여 삼별초군 13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이로써 삼별초의 항쟁은 3년 만에 완전히 종식됐다.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의 압도적인 병력의 공격에도 3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삼별초가 매우 강력한 전투 병력이기도 하지만, 그 배후에서 남도 각처의 농민들이 삼별초의 항거에 적극적으로 호응했기 때문이다.

 삼별초의 평가는 시기마다 달랐다. 고려정부는 삼별초의 항쟁을 명백한 반역행위로 보았다. 따라서 전근대 왕조는 삼별초의 항쟁을 국가에 대한 반역 세력, 정치적 반란으로 규정하고 ‘작란(作亂)’ ‘역적(逆賊)’ ‘적당(賊黨)’ 등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인식은 일제시대 식민사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군사정권은 무신정권을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정치세력으로 높이 평가하고, 삼별초군의 활동을 ‘국난 극복’의 사례로 꼽았다. 민족주의적인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이 때문에 삼별초에 대한 평가는 1980년대 초반까지 삼별초의 항쟁만을 크게 부각시키며 진행됐다. 이후의 연구는 민중의 자발적 항쟁과 개경환도와 삼별초 혁파에 따른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국난극복사적’ 이해가 편협한 것만큼, 개인적 주관에 따라 그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 역시 위험한 논리다. 삼별초 항쟁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려준 값진 투쟁이며, 고려인의 기상과 자부심이 녹록지 않았음을 보여준 몇 안 되는 사례라 할 것이다.

〔출처 : 홍영의 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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