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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징기즈칸 리더십
 작성자 : 관리자 2011.03.08 09:31:38, 조회 1,653 

징기즈칸 리더십


① 첫 번째 징기즈칸의 리더십 중에 주목 받을 점은 그의 '웅대한 비전'이다.

일찍이 과거에도 없었고 누구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가능하게 만든 대단한 비전이다. 그의 비전이 처음부터 컸던 것은 아니었다. 17살의 어린 소년 테무진이 타타르족의 습격으로 아버지를 잃고 그의 부족은 모조리 흩어 졌으며 자신은 포로로 잡혀 끌려가는 신세에 처해졌다. 이때 그가 가진 목표는 '흩어진 부족을 되찾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다. '할 일이 있는 한 나는 죽을 수 없다'라는 그의 말과 같이 온갖 모험과 역경을 거쳐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루었는데, 테무진의 결론은 그의 부족들이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 더 잘 뭉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같은 공동의 목표는 소박하거나 곧 이룩될 만한 작은 것에서는 별반 효과가 없었으며, 원대야망한 것이라야 사람들이 큰 힘을 낸다는 것이었다. 징기즈칸 리더십의 면면에는 한가지 공동목표가 달성되기가 무섭게 곧 다음의 새로운 공동목표를 만들어 쉬지 않고 달려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그의 부족을 이끌어 갔다. 그리고 그 비전은 나라를 만드는 것, 주변국가로부터의 위협을 없애는 것, 아예 중원을 경영하는 것, 나아가 천하를 통일하는 것, 그리고 그 천하는 중국 땅을 넘어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땅으로 계속 커져만 갔으며, 그 꿈들을 하나 하나 실현시켜 나갔다.


② 두 번째는 명분과 정당성의 확보이다.

부족들은 명예를 중시하고 이름 석자에 대한 오명을 몹시도 싫어한다. 항상 그들은 옳은 쪽으로 평가 받기를 원한다. 청군 아니면 백군인 상태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들은 정의의 편이라는 생각으로 싸우게 하도록, 같은 전쟁을 하더라도 명분이 없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금나라 100만 대군을 칠 때도 그 명분은 나라를 물려 받지 못할 불효한 놈이 천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일종의 해방전쟁이라는 명분을 걸고 땅을 빼앗거나 명분 없는 약탈을 자제시켰다.


③ 세 번째는 슈퍼 리더십이다.

중앙아시아, 그리스 발칸반도, 모스크바, 베를린 등, 엄청난 거리의 원정에도 불구하고 징기즈칸 자신은 본토를 벗어 나 본 적이 없었다.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벌판에서 말을 부리던 부하들이 대군사를 지휘하고 신출귀몰한 전략을 구사하는 대장군으로 변신된 것이다. 부하를 육성함은 물론 전권을 주어 현지의 왕을 임명하고, 인접국가에의 전쟁 여부까지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리고 서양세계 정신적 지주인 교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숙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권한을 현지에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게끔 현지의 지휘관이 철저히 알아서 하도록 맡겼다.


④ 네 번째로 징기즈칸은 그의 부족들이 끊임없는 상무정신(尙武精神)에 젖어 있기를 바랬다.

그의 마지막 유언 중의 하나가 ‘흙벽돌집에 살지 말라’는 것이다. 흙벽돌집 생활은 정착생활을 의미하며 곧 말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허벅지에 살이 찌고 배부른 기름 맛을 알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원정길을 포기하고 음주가무에 빠져 들 것임으로 이를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살림이 풍족해지면 더 많은 재물에 욕심을 내고 단신의 군장이 온갖 재물보화로 무거워질 것이기 때문이며 서로 많은 재물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울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⑤ 다섯 번째 리더십 비밀은 스피드다.

마차로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2년이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중원을 점령하던 2년여의 세월은 거의 말을 달리는 속도로 영토를 점령해 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원정군들은 온갖 작전계획을 세우느라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수많은 정보와 판단을 요구하는 결정임에도 그들은 철저한 임장주의(臨場主義)를 선택하였다. 이는 현대적 의미의 현장주의인데, 탁상공론으로 세월을 보내 봤자 소용이 없고 ‘저 산을 넘어 가 보아야 그곳이 산일지 바다일지를 안다’는 모토로 일단 대원칙을 먼저 세우고 행동에 옮기며 상황을 보아가며 세부적인 사항을 그때 가서 결정한다는 방식이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을 테지만 이는 모르고 내린 결정보다 안전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무모한 방식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조직이 기동력에서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몽고말과 손에 익은 작은 칼, 그리고 사냥터에서 갈고 닦은 그들의 활솜씨는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한 중세서양의 병정들을 양철 허수아비처럼 다루기 편한 연습상대에 불과했다. 중후장대가 아니라 경박단소가 세계를 점령한 것이다. 직관적 감각과 선이 굵은 대원칙주의였다.


⑥ 여섯 번째는 그의 통합적 패러다임에 있다.

일단 전쟁을 벌인 적국이라 할지라도 전쟁이 끝난 뒤 제국의 일원으로 충성을 맹약하기만 하면 이러 저러한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그들의 재산은 물론, 왕권 심지어 종교까지 자율권을 부여했다. 각 국가가 가진 고유의 특수성(개체성)을 보존하는 것은 보편성(전체성)을 의미하는 제국에 대한 충성 하나로 허용되었던 것이다.


⑦ 일곱 번째는 현대인의 생각을 앞지를 정도의 성개방 의식에 있다.

아울러 자손을 번영시키는 근본으로서의 여성 지위를 무척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의 아내는 자신의 부락이 공격 받았을 때 적국에게 납치되어 2년여를 적의 장수에게 잡혀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아내를 되찾았을 때는 이미 그의 아내는 적국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하에 그 사실을 알리고 나의 아내가 낳은 아이는 나의 자식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대몽골족의 장손으로 남아 아버지 위업을 이어 받게 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고려시대의 공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해가 빨리 된다. 공녀로 끌려간 고려의 아녀자들은 그들의 원래 가문의 등급에 따라 대접을 받게 되는데, 공녀 위씨는 나중에 원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기도 한다.


⑧ 여덟 번째는 조직력에 있다.

대장군 밑에는 사단과 연대, 대대, 중대 등이 편성되었는데, 그와 같은 군대의 편성은 먼 훗날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전에는 없던 형태의 조직이라고 한다. 징기즈칸은 뛰어난 조직가로도 유명한데, ‘어떤 조직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징기즈칸은 ‘나라를 함께 세우고 고생한 자들’ 즉 건국공신 88명을 천호장(千戶長)에 임명했다. 그 중에는 두세 개의 천호를 가진 자들도 있었으므로 전체 95개의 천호가 편성되었고 이것이 몽골이라는 국가의 사회조직이 되었다. 천호라고 하면 천명의 전사(戰士)를 제공할 수 있는 단위이고, 그 밑에 백호, 또 십호가 있어서 사회조직 자체가 군대조직과 동일하였다. 따라서 사회조직이든 군사조직이든 동일하였고, 징기즈칸을 정점으로 완전히 재편되었다. 징기즈칸은 종종 적군을 숫자로 압도하며 일렬 횡대로 진격하여 눈깜짝할 새에 포위하는 전법을 썼는데, 이는 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전법이었다. 이러한 그의 조직력은 엄격한 군율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도 군율을 어기면 엄격하게 벌을 주었다. 그의 몽골군이 승리를 거두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기동력이었는데, 키가 작기로 유명한 몽골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던 백성들이 자기 몸에 딱 맞는 칼을 쥐고 먼지를 일으키며 전쟁터를 질주하였다. 몽골군의 전령은 10마리의 말을 끌고 달리며 교대로 말을 갈아 타며 2천리를 내리 달렸다는 기록이 있다. 몽골에서는 매년 가을 소를 잡아 뼈를 발라낸 뒤 고기를 세로로 길게 자른다. 이 고기를 3~4개월 이상 건조한 창고 등에서 바싹 말린 뒤 가루로 빻은 것이 보르츠이다. 소 방광 하나에 한마리 분량의 고기가루가 들어가며 무게는 3~4 kg에 불과하다. 몽골군은 병사 한 명이 보르츠를 가득넣은 소 방광을 두 개씩 휴대해 다녔다. 이것들에 더운물만 부으면 완벽한 초간편식량이 되었으므로, 병사 한 명이 적어도 몇 달치 식량을 깔고 달리는 셈이었다. 몽골의 역사 속에 더욱 놀라운 것은 역참제도이다. 수도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공용도로를 개설하고 일정거리마다 역을 세웠는데, 그의 손자 오고타이칸이 즉위할 무렵에는 역전을 위한 말이 20만필, 역사만도 1만개가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도로운영으로 상인이 다니게 되었고 로마교황의 사자가 다녔으며 마르코폴로 부자도 이 길로 몽골에 이르게 되었다. 강력한 지휘명령 체계로 군율이 잡힌 조직력과 기동력, 이것이 징기즈칸 리더십의 핵심적 성공비결이다.


⑨ 아홉 번째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교역의 장려였다.

그가 대칸(大汗)에 오르자 엄청난 재보가 들어왔다. 이란이나 아라비아의 산물이 받쳐졌는데, 이런 먼 나라의 진기한 물건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위그르인들에 의해서였다. 대부분의 위그르인들은 이슬람교도들이었다. 일찍이 그들의 사라센제국은 8, 9세기의 영광을 뒤로하고 쇠퇴해 진 상태였지만 그들의 왕성한 교역활동은 여전하였다. 징기즈칸은 자신의 국가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위그르인들의 교역활동을 돌봐 주었다. 그들도 징기즈칸의 무력에 의해 교역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였다. 대부분의 중세국가에서는 이교도들을 적으로 보았지만, 징기즈칸은 실사구시적인 정신으로 이교도를 통하여 국익을 증가시켰고, 그 같은 개방정책으로 선진화된 문명과 각종 과학기술을 교류하였다. 징기즈칸 사후에 호라즘의 수도 사마르칸드를 점령하였을 때 종전의 섬태멸진 전법에 의해 대부분의 주민을 몰살시켰지만, 공예가나 직인들 같은 기술을 가진 자들 3만명은 죽이지 않고 몽고 본토로 후송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동방에 이르는 길목에는 각종 소국이 자리잡아 통행하기가 곤란하였고, 그 중간 중간의 험한 길에는 도적들이 들끓어 동서교류가 곤란하였다. 그러나 원대에 이르러 동서왕래가 활발해졌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과학문명의 발전이 3세기가량 앞당겨졌다는 평가도 있다.


⑩ 마지막 비밀은 훌륭한 그의 참모에 있다.

그의 주위에는 많은 인재를 두어 각종 자문에 응하게 하였다. 그 중 하나가 야율초재(耶律楚材)다. 그는 징기즈칸이 두 번째로 금을 정벌할 때 중도의 성을 지키고 있던 26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금에 의해 멸망한 요나라의 귀족이었는데, 유불선 3교에 통달하고 모든 학문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를 불러 칸은 말했다. ‘요와 금은 원수지간이다. 내가 금을 무찔러 그대의 원수를 갚았노라.’ 그러자 초재는 하나의 두려움도 없이 큰소리로 말했다. ‘나의 선조도 나의 부친도 모두 금의 조정에 봉사하였습니다. 한번 신하가 된 이상에는 어찌 두 마음을 품고 주군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겠나이까?’ 징기즈칸은 이 대답이 마음에 들어 그를 항상 곁에 두고 정치 상담역으로 삼았다.


출처 : 석조건물 문화유산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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