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과 몽골제국(蒙古帝國)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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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관리자 |
2011.02.21 13:07:51, 조회 1,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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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테무진은 15세가 되었다. 몽골족에게는 이 또래의 젊은이는 성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궁핍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테무진은 벨구테이와 함께 콩기라트부(部)의 데이 세첸을 찾아가 어린 시절부터 약속되었던 딸 보르테 위진과 결혼시켜 줄 것을 요구하여 이를 허락 받았다. 신부의 어머니는 시부모에게 주는 예물로 검은 담비털 코트를 마련하였다. 테무진은 보르테와 결혼하자, 오논강 상류에서 케룰렌강 상류로 거처를 옮기고 자신의 세력권을 형성하려 하였다. 그래서 보오르추를 부르자 그는 즉시 달려왔다. 테무진에게는 최초의 심복이었다. 물론 그의 동생들도 있었다. 명사수인 조치 카사르, 도끼로 나무를 조각하는 벨구테이, 모두 벌써 훌륭한 전사로 성장하였다. 그렇지만 에수게이 바아토르의 세력이 이미 무너졌고, 또 자무카와 타이치우드씨족 그리고 케룰렌호와 에르군네강 일대의 몽골씨족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테무진이 외부의 지원 없이 자력으로 자신의 세력을 새로이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어려서 경험한 가난은 테무진의 신체를 단련시켰고 초원의 위험은 정신을 예민하게 하였다. 또한 그가 겪은 포로생활은 적의 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권력의지로 야심만만한 테무진은 우선 새로운 주인을 섬겨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테무진은 당시 몽골고원의 강자이자 에수게이 바아토르와 안다 관계였던 케레이트부족 토오릴에게 기대려 하였다. 그 당시 토오릴은 타이치우드씨족이나 자무카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몽골부족 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토오릴 역시 격동의 젊은 세월을 보냈다. 그는 7세 때에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당하여 고통을 겪었고, 13세 때에는 어머니와 함께 타타르부족에 끌려가 낙타를 돌보는 노비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는 아버지 쿠르자쿠스 부이룩 칸이 죽은 뒤 칸이 되었지만 구르칸이던 숙부에게서 쫓겨나 테무진의 아버지인 에수게이 바아토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쿠툴라칸은 에수게이 바아토르에게 돕지 말라고 경고를 하였으나 에수게이 바아토르는 이에 따르지 않고 구르칸을 쳐부순 뒤 토오릴에게 부족민들을 되돌려주었다.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강력한 통치자 토오릴의 관심과 호의를 끌기 위해 아내 보르테 위진이 결혼할 때 지참했던 담비털 코트를 가지고 동생 조치 카사르와 벨구테이를 데리고 톨라강 카라 툰에 머물고 있던 토오릴을 찾아갔다. 그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오논강부터 몽골인들이 사는 초원을 거쳐 동쪽으로는 중국의 변경지방에 이르렀다. 그의 명성은 무엇보다도 그가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대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힘의 배경에 있었다. 테무진은 토오릴에게 그의 아버지 에수게이 바아토르가 그와 맺었던 안다 관계를 상기시킨 뒤, 자신은 그 관계에 따라 그를 아버지로 모시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가져온 담비털 코트를 받쳤다. 토오릴은 한때 테무진의 아버지에게 구원받았던 일을 잊지 않고 매우 기뻐하면서 담비털 코트를 받아 들고, "흩어진 너의 부족민을 모아주겠다. 선물에 대한 답례로 떨어져나간 너의 부족민을 거두어 주겠다"면서 그를 신하로 받아들였다.
에수게이 바아토르가 죽고 테무진이 타이치우드씨족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에도 외면했던 토오릴이 그를 동맹자로 받아들인 것은 당시 동맹을 맺고 있었던 자무카 같은 큰 세력보다는 언제나 자기에게 충성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동맹세력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토오릴은 숙부인 구르칸뿐만 아니라 아들인 닐카 셍굼 조차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어 가족에게 조차 의지할 수 없었던 차에 테무진이야 말로 호감이 가는 상대였다. 반면 테무진은 토오릴을 자신의 의부로 삼고 그와 주종관계를 맺음으로써 강력한 보호막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테무진의 인생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초원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소문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의 명성은 높아졌고 초원의 유목민들은 그를 알아주기 시작하였다.
에수게이 바이토르의 노비였던 우량카이족에 속하는 자르치우다이 에부겐은 테무진이 출생할 때 에수게이 바아토르에게 약속했던대로 부르칸칼둔산에서 풀무를 메고 아들 젤메를 데리고 테무진에게로 왔다. 자르치우다이 에부겐은 "오논강의 델리운 볼닥에서 테무진이 태어났을 때, 나는 테무진에게 수달피 포대기를 예물로 주었다. 그리고 또 나의 아들인 젤메도 주었다. 그러나 당시 젤메가 너무 어리다고 해서 나는 젤메를 데리고 갔다. 지금 젤메를 줄테니 젤메에게 말안장을 얹게하는 일을 시키거나 문을 열어주게 하는 일을 시키라."며 테무진에게 머물러 봉사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호엘룬의 일족인 올쿠누트씨족도 테무진에게 예속되었다.
이 당시 자무카는 이미 몽골부족의 실력자였다. 자무카의 세력기반은 키야트씨족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탈구타이 키릴툭 사건으로 타이치우드씨족과 적대관계에 있던 테무진은 키야트 보르지긴씨족을 대부분 흡수하고 있는 자무카를 통하지 않고서는 대대적인 세(勢)확장이 불가능하였다.
출처 : 석조건물 문화유산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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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it16b><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킵차크한국 <SPAN lang=EN-US>(Kipchak Khanate)<?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B></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남러시아에 성립한 몽골왕조<SPAN lang=EN-US>(1243</SPAN></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바탕">∼</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1502</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년<SPAN lang=EN-US>)</SPAN>로서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금장한국<SPAN lang=EN-US>(</SPAN>金帳汗國<SPAN lang=EN-US>)</SPAN>이라고도 한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의 장자 주치<SPAN lang=EN-US>[</SPAN>求赤<SPAN lang=EN-US>, </SPAN>拙赤<SPAN lang=EN-US>]</SPAN>는 이르티시강<SPAN lang=EN-US>(</SPAN>江<SPAN lang=EN-US>) </SPAN>이서<SPAN lang=EN-US>(</SPAN>以西<SPAN lang=EN-US>)</SPAN>의 스텝을 영지로 받았으나<SPAN lang=EN-US>, 주</SPAN>치의 사후 그의 차남 바투는 몽골 서정군의 총수가 되어 러시아 및 동유럽 각지를 석권함과 동시에 남러시아를 확실히 장악하여 킵차크한국의 기초를 구축하였다<SPAN lang=EN-US>. </SPAN>신도<SPAN lang=EN-US>(</SPAN>新都<SPAN lang=EN-US>) </SPAN>사라이가 선 볼가강의 하류지방은 유라시아의 스텝을 경유하는 실크로드와 북방으로부터의 모피로<SPAN lang=EN-US>(</SPAN>毛皮路<SPAN lang=EN-US>)</SPAN>가 교차되는 요충을 점하여 오랫동안 투르크계 하자르족이 활약하는 무대가 되어 있었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몽골군이 출현했을 때에는 같은 투르크계 킵차크족이 북쪽의 불가르<SPAN lang=EN-US>, </SPAN>서쪽의 슬라브 및 동로마<SPAN lang=EN-US>, </SPAN>동남의 이슬람권과의 사이의 중계무역에 의하여 번영하였다<SPAN lang=EN-US>. </SPAN>또 몽골의 지배자가 급속히 투르크화<SPAN lang=EN-US>, </SPAN>이슬람화한 현상도 같은 사실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SPAN lang=EN-US>. </SPAN>이 나라는 그 중계적 입장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제<SPAN lang=EN-US>4</SPAN>대의 베르케칸이 건설한 신<SPAN lang=EN-US>(</SPAN>新<SPAN lang=EN-US>)</SPAN>사라이는 구<SPAN lang=EN-US>(</SPAN>求<SPAN lang=EN-US>)</SPAN>사라이와 함께 국제시장으로서 크게 번창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제<SPAN lang=EN-US>9</SPAN>대 우즈베크칸의 최성기 이후<SPAN lang=EN-US> 14</SPAN>세기말부터 티무르군에게 유린되는 등 퇴색이 짙어져서 국토는 카잔<SPAN lang=EN-US>, </SPAN>크림<SPAN lang=EN-US>, </SPAN>아스트라한의<SPAN lang=EN-US> 3</SPAN>한국으로 분열되고 그들이 대립<SPAN lang=EN-US>·</SPAN>항쟁하는 가운데 멸망하였다<SPAN lang=EN-US>. <BR><BR><BR></SPAN></SPAN><SPAN class=tit16b><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크림한국 <SPAN lang=EN-US>(Khanate of the Crimea)<o:p></o:p></SPAN></SPAN></B></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크림반도<SPAN lang=EN-US>(</SPAN>半島<SPAN lang=EN-US>)</SPAN>를 중심으로 하여 성립된 몽골계 왕조<SPAN lang=EN-US>(1430</SPAN></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바탕">∼</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1783</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년<SPAN lang=EN-US>)</SPAN>로서<SPAN lang=EN-US>, </SPAN></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바투의 아우 토카티무르의 후예 하지 기레이가 킵차크한국으로부터 독립 건국하였다<SPAN lang=EN-US>. </SPAN>반도 남쪽 바그체 사라이에 수도를 정하여 북방 및 동방과 연락하는 상로<SPAN lang=EN-US>(</SPAN>商路<SPAN lang=EN-US>)</SPAN>인 흑해<SPAN lang=EN-US>(</SPAN>黑海<SPAN lang=EN-US>)</SPAN>로의 출구를 가로막고<SPAN lang=EN-US>, </SPAN>제노바인<SPAN lang=EN-US>(</SPAN>人<SPAN lang=EN-US>)</SPAN>의 식민지 카파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했다<SPAN lang=EN-US>. </SPAN>제<SPAN lang=EN-US>2</SPAN>대 멘그리기레이 때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속국이 되었으나 이후<SPAN lang=EN-US> 2</SPAN>세기에 걸쳐 존속하였다<SPAN lang=EN-US>. 1738</SPAN>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SPAN lang=EN-US> 2</SPAN>세에 의해 멸망하였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it16b><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카잔한국 <SPAN lang=EN-US>(Kazan Khanate)<o:p></o:p></SPAN></SPAN></B></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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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it16b><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사한국<SPAN lang=EN-US> (</SPAN>四汗國)</SPAN></B></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it16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기즈칸이<SPAN lang=EN-US> 4</SPAN>명의 아들에게 분봉<SPAN lang=EN-US>(</SPAN>分封<SPAN lang=EN-US>)</SPAN>한<SPAN lang=EN-US> 4</SPAN>개의 한국으로서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킵차크한국<SPAN lang=EN-US>[</SPAN>金帳汗國<SPAN lang=EN-US>](1243</SPAN>년<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한국<SPAN lang=EN-US>(1224</SPAN>년<SPAN lang=EN-US>), </SPAN>일한국<SPAN lang=EN-US>(1258</SPAN>년<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한국<SPAN lang=EN-US>(1227</SPAN>년<SPAN lang=EN-US>)</SPAN>을 말한다<SPAN lang=EN-US>. </SPAN>몽골제국의 분열조짐은 징기즈칸이 아들에게 땅을 분봉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장남 주치<SPAN lang=EN-US>(Juchi, 1185~1127</SPAN>년<SPAN lang=EN-US>), </SPAN>차남 차가타이<SPAN lang=EN-US>(Chagatai), </SPAN>삼남 오고타이<SPAN lang=EN-US>(Ogotai, 1186~1241</SPAN>년<SPAN lang=EN-US>)</SPAN>에게 북외몽골 및 그 서부를 봉지로 주었고<SPAN lang=EN-US>, </SPAN>막내아들 툴루이<SPAN lang=EN-US>(Tolui, 1190~1232</SPAN>년<SPAN lang=EN-US>)</SPAN>는 곁에 두었다<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SPAN lang=EN-US>(</SPAN>태종<SPAN lang=EN-US>) </SPAN>때에 이르러 주치의 아들 바투<SPAN lang=EN-US>(Batu, 1205~1255</SPAN>년<SPAN lang=EN-US>)</SPAN>가 남러시아에 킵차크한국을<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는 중앙아시아에 차가타이한국을 건설하고<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는 외몽골<SPAN lang=EN-US>·</SPAN>내몽골<SPAN lang=EN-US>, </SPAN>그리고 북중국을 점령하였으나 툴루이는 봉토를 갖지 못하였다<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오고타이칸(태종)의 아들 구유쿠칸(정종, 재위<SPAN lang=EN-US> 1246~1248</SPAN>년<SPAN lang=EN-US>)</SPAN>이 일찍 죽자 제국의 정치<SPAN lang=EN-US>·</SPAN>군사 위원회인 쿠릴타이<SPAN lang=EN-US>(Kurultai)</SPAN>는 툴루이의 아들 몽케칸(<SPAN lang=EN-US>Möngke Khan, 헌종, </SPAN>재위<SPAN lang=EN-US> 1251~1259</SPAN>년<SPAN lang=EN-US>)</SPAN>을 황제로 옹립하였으며<SPAN lang=EN-US>, 몽케칸</SPAN>은 외몽골 지방으로부터 북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SPAN lang=EN-US>. 몽케칸</SPAN>은 새로운 봉지를 찾기 위해 동생 훌라구를 페르시아에 파견하여 일한국을 세우게 하는 한편 자신은 동생 쿠빌라이와 함께 남송<SPAN lang=EN-US>(</SPAN>南宋<SPAN lang=EN-US>)</SPAN>을 정복하기 위해 나섰다<SPAN lang=EN-US>. </SPAN>전쟁 도중에 몽케칸이 죽었으며<SPAN lang=EN-US>, </SPAN>쿠빌라이<SPAN lang=EN-US>(Khublai, 세조, </SPAN>재위<SPAN lang=EN-US> 1260~1294</SPAN>년<SPAN lang=EN-US>)</SPAN>는 베이징(北京)으로 귀환하여 임시 쿠릴타이를 개최하고<SPAN lang=EN-US> 1260</SPAN>년 대칸(大汗)에 즉위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러자 이를 반대하던 사한국이 독립을 선언하였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오고타이한국은 몽골적 색채가 가장 강한 나라였다<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한국의 지배자 하이두<SPAN lang=EN-US>(Haidu)</SPAN>는 전몽골의 지배권을 얻기 위해<SPAN lang=EN-US> 30</SPAN>여년 중앙의 쿠빌라이칸(세조)에 대항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SPAN lang=EN-US>, </SPAN>그 후 차가타이한국에 합병되었다<SPAN lang=EN-US>. </SPAN>중앙아시아를 지배한 차가타이한국도 칸위(汗位)<SPAN lang=EN-US> </SPAN>계승권을 둘러싼 싸움 끝에 쇠퇴하여<SPAN lang=EN-US>, 14</SPAN>세기 중엽에는 동투르키스탄의 동차가타이한국과 서투르키스탄의 서차가타이한국으로 분열되었다<SPAN lang=EN-US>. </SPAN>티무르제국이 일어나자 서차가타이는 그 영토의 일부가 되고 동차가타이는 그 속국이 되었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이슬람 영토에 세워진 일한국은 초기에는 <SPAN lang=EN-US><A class=con_link href="http://100.naver.com/100.nhn?docid=25779" target=_blank _cssquery_UID="32"><SPAN style="COLOR: black; TEXT-DECORATION: none; text-underline: none" lang=EN-US><SPAN lang=EN-US><U>그리스도교</U></SPAN></SPAN></A></SPAN>를 옹호하고 이슬람교를 압박하였으나<SPAN lang=EN-US>, </SPAN>뒤에는 이슬람문화를 발전시켜 몽골<SPAN lang=EN-US>·</SPAN>페르시아문화를 꽃피우고<SPAN lang=EN-US>, </SPAN>수학<SPAN lang=EN-US>·</SPAN>지리학<SPAN lang=EN-US>·</SPAN>역사학 분야의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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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lang=EN-US>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TRONG><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몽골의 멸망<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STRONG></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몽골제국의 종주국인 원이 망한 이유는 중국에서 몽골인들이 매우 소수였다는 점이다<SPAN lang=EN-US>. </SPAN>중국처럼 인구가 매우 많고 넓은 나라를 이민족이 통치하기란 매우 어렵다<SPAN lang=EN-US>. </SPAN>몽골족은 우수한 군사력을 앞세워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전체를 지배하였지만 중요한 실책을 저질렀다<SPAN lang=EN-US>. </SPAN>최상층인 몽골인과 그 다음 지배층인 색목인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는데도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들을 지나치게 차별했다<SPAN lang=EN-US>. </SPAN>한족들은 관직에 나갈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고<SPAN lang=EN-US>, </SPAN>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졌으며<SPAN lang=EN-US>, </SPAN>법적 사회적인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SPAN lang=EN-US>. </SPAN>중국은 원제국 황제의 개인 소유물로 취급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러한 불만이 쌓인 한족들을 억누를 수 있는 수단은 강력한 군사력밖에 없었는데<SPAN lang=EN-US>, </SPAN>쿠빌라이칸<SPAN lang=EN-US>(</SPAN>세조<SPAN lang=EN-US>) </SPAN>이후로 오랫동안 몽골군들은 전투에 나서지 않아 전투력이 약해졌으며<SPAN lang=EN-US>, </SPAN>그나마 상당수는 다른 직업으로 전환했다<SPAN lang=EN-US>. </SPAN>쿠빌라이칸 이후 문종<SPAN lang=EN-US>(1329~1332</SPAN>년<SPAN lang=EN-US>, </SPAN>투크테무르<SPAN lang=EN-US>)</SPAN>만이 중앙아시아의 차카타이한국으로 원정을 했을 뿐 다른 황제들은 전쟁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SPAN lang=EN-US>. </SPAN>또한 원 왕실 내부에서는 치열한 제위 쟁탈전이 벌어져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원의 멸망에 직접적으로 작용한 홍건적의 난 등이 중국 각지에서 일어났다<SPAN lang=EN-US>. </SPAN>이 난들은 경제적인 문제에 원인이 있었다<SPAN lang=EN-US>. </SPAN>원나라는 쿠빌라이 시대에 처음으로 지폐를 사용하는 등 금융상으로 앞선 면도 있었으나 경제관념의 희박으로 화폐발행을 제대로 못하여 원나라 말기에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SPAN lang=EN-US>. </SPAN>게다가 황하가 범람하는 등 자연 재해까지 겹쳐 백성들의 상태는 매우 핍박했다<SPAN lang=EN-US>. </SPAN>황하의 범람은 전답은 말할 것도 없고 대운하의 수로마저 파괴하여 화북지방의 식량 공급마저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마침내<SPAN lang=EN-US> 1351</SPAN>년 한산동을 중심으로 유복통이 이끄는 백련교도들이 홍건적의 난을 일으켰고<SPAN lang=EN-US>, </SPAN>이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SPAN lang=EN-US>. </SPAN>홍건적은 중국 각지를 휩쓸었고 심지어 고려까지 쳐들어 갔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몽골군은 홍건적을 무찔렀고 홍건적은 끝내 다른 반란군의 무리인 장사성의 군대에게 패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역시 다른 반란군인 곽자흥의 부장 주원장이 홍건적의 마지막 수령인 한림아를 죽임으로써 홍건적은 완전히 평정되었다<SPAN lang=EN-US>. </SPAN>홍건적 이외에도 장사성<SPAN lang=EN-US>, </SPAN>곽자흥<SPAN lang=EN-US>, </SPAN>주원장<SPAN lang=EN-US>(</SPAN>곽자흥군에서 독립<SPAN lang=EN-US>), </SPAN>서수휘<SPAN lang=EN-US>, </SPAN>진우량<SPAN lang=EN-US>(1360</SPAN>년 서수휘를 죽임<SPAN lang=EN-US>), </SPAN><?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contacts" /><st1:PersonName w:st="on">방국진</st1:PersonName> 등이 반란을 일으켜 원나라는 도저히 이들을 다 진압할 수 없었다<SPAN lang=EN-US>. </SPAN>원나라가 각지의 반란군을 토벌하는 와중에도 여러 반란세력끼리의 싸움은 계속되어 마침내 주원장이 모든 반란세력들을 없앴다<SPAN lang=EN-US>. </SPAN>이제 주원장과 원나라의 싸움만 남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주원장은 장사성의 세력을 제거한 후 북벌군을 편성해 사방에서 원으로 진격했으며<SPAN lang=EN-US>, </SPAN>다음 해인<SPAN lang=EN-US> 1368</SPAN>년 남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명<SPAN lang=EN-US>(</SPAN>明<SPAN lang=EN-US>)</SPAN>나라를 세웠다<SPAN lang=EN-US>. </SPAN>명군이 북상하는 와중에도 원나라 조정은 내분에 급급하여 이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SPAN lang=EN-US>. </SPAN>내분이 마침내 끝났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SPAN lang=EN-US>. </SPAN>그 동안 반란군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쿠쿠테무르 같은 원나라의 유능한 무장도 더 이상 명군을 대적할 수가 없었다<SPAN lang=EN-US>. </SPAN>마침내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는 북쪽으로 몽진에 나섰으나 응창부에서 죽고<SPAN lang=EN-US>, </SPAN>곧바로 명군이 응창부를 습격하여 원 황족들을 포로로 잡았다<SPAN lang=EN-US>. </SPAN>황태자 아이유시리타라만이 약간의 기병들에게 호위되어 북쪽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하여 북원을 세웠으나<SPAN lang=EN-US>, </SPAN>중국 왕조로서의 원나라는<SPAN lang=EN-US> 1368</SPAN>년에 멸망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아이유시리타라는 소종으로서<SPAN lang=EN-US> 1370</SPAN>년부터<SPAN lang=EN-US> 1378</SPAN>년까지 몽골을 다스렸고<SPAN lang=EN-US>, </SPAN>뒤이어 토쿠스테무르가 다스렸으나<SPAN lang=EN-US> 1388</SPAN>년 에스델이라는 자에게 피살됨으로써 북원도 약<SPAN lang=EN-US>20</SPAN>년만에 망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 뒤 몽골은 원의 정통 후계인 타타르<SPAN lang=EN-US>(</SPAN>몽고 동부를 지배<SPAN lang=EN-US>)</SPAN>와 오이라트<SPAN lang=EN-US>(</SPAN>몽고 서부를 지배<SPAN lang=EN-US>)</SPAN>로 나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 두 부족은 번갈아 가며 명나라와 대립했지만 영락제의 <SPAN lang=EN-US>5</SPAN>차례의 막북원정으로 멸망했다<SPAN lang=E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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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class=tit16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3d3d3d; FONT-SIZE: 9pt">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class=tit16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3d3d3d; FONT-SIZE: 9pt"><STRONG>몽골제국의 확대와 분열<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TRONG></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FONT color=#000000>칸<SPAN lang=EN-US>(</SPAN>汗<SPAN lang=EN-US>)</SPAN>은 원래 유력한 부족장들의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선출되었으나<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의 즉위 후 이 관례는 형식적이 되었고<SPAN lang=EN-US>, 1227</SPAN>년에 그가 죽자 쿠릴타이에서는 징기즈칸이 죽기 전에 이미 지명한 오고타이를 대칸에 즉위하도록 결정하였다<SPAN lang=EN-US>. <BR><BR><o:p></o:p></SPAN></FONT></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FONT color=#000000>오고타이는 금<SPAN lang=EN-US>(</SPAN>金<SPAN lang=EN-US>)</SPAN>나라와 대규모 전쟁을 재개하여 이를 멸망시키고<SPAN lang=EN-US>, 1234</SPAN>년에는 화이허강<SPAN lang=EN-US>(</SPAN>淮河<SPAN lang=EN-US>) </SPAN>이북의 중국을 점령하였다<SPAN lang=EN-US>. </SPAN>한편 주치의 둘째 아들 바투에게 명하여 러시아 및 유럽 각지를<SPAN lang=EN-US> 1235∼1242</SPAN>년에 토벌하게 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 결과 남<SPAN lang=EN-US>(</SPAN>南<SPAN lang=EN-US>)</SPAN>러시아는 킵차크한국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태종<SPAN lang=EN-US>(</SPAN>太宗<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칸은 오르혼강 상류지역에 수도 카라코룸성<SPAN lang=EN-US>(</SPAN>城<SPAN lang=EN-US>)</SPAN>을 구축하고<SPAN lang=EN-US>, </SPAN>이곳을 기점으로 전 영토로 통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그 연도<SPAN lang=EN-US>(</SPAN>沿道<SPAN lang=EN-US>)</SPAN>에 역전<SPAN lang=EN-US>(</SPAN>驛傳<SPAN lang=EN-US>)</SPAN>제도를 정비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 제도로 광대한 영토 내의 교통이 용이하고 편리하게 소통되었기에 동서문물의 교류가 활발하게 촉진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FONT></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FONT color=#000000>또 오고타이칸은 옐뤼<SPAN lang=EN-US>, </SPAN>취치이 등 정복지역의 학자나 문화인 등을 등용하여 행정기구를 정비하고<SPAN lang=EN-US>, </SPAN>최초의 정액세법<SPAN lang=EN-US>(</SPAN>定額稅法<SPAN lang=EN-US>)</SPAN>을 시행하였다<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칸의 사후 그의 황후가 섭정을 한 다음<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의 큰아들 구유크가 제<SPAN lang=EN-US>3</SPAN>대의 대칸위<SPAN lang=EN-US>(</SPAN>位<SPAN lang=EN-US>)</SPAN>에 올랐으나<SPAN lang=EN-US> 3</SPAN>년 만에 죽자<SPAN lang=EN-US>, </SPAN>다시 황후가 섭정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처럼 대칸위의 공백시대가 계속되었던 것은 오고타이 일가와 바투를 지지하는 툴루이 일가와의 대립이 치열하였기 때문이었다<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 일가에서는 다음 대의 대칸위에 오고타이의 손자인 쿠주크 시레문을 추대하였고<SPAN lang=EN-US> </SPAN>바투는 툴루이의 큰아들 몽케를 추대하였기에 싸움은 계속되었는데<SPAN lang=EN-US>, </SPAN>결국 툴루이측의 승리로 몽케가 제<SPAN lang=EN-US>4</SPAN>대 대칸이 되었다<SPAN lang=EN-US>. 이</SPAN>후로는 툴루이의 자손이 원조<SPAN lang=EN-US>(</SPAN>元朝<SPAN lang=EN-US>: 1271∼1368</SPAN>년<SPAN lang=EN-US>)</SPAN>에서 대칸위를 독점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이와 같은 일족 내부의 대립과 항쟁은 몽골제국을 분열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FONT></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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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font-kerning: 0pt"><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font-kerning: 0pt">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font-kerning: 0pt"><STRONG>징기즈칸의 사후<BR><BR><SPAN lang=EN-US><o:p></o:p></SPAN></STRONG></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징기즈칸이<SPAN lang=EN-US> 1227</SPAN>년에 사망했을 때<SPAN lang=EN-US>, </SPAN>몽골족의 총병력은 고작<SPAN lang=EN-US> 12</SPAN>만<SPAN lang=EN-US>9</SPAN>천 명에 불과했다<SPAN lang=EN-US>. </SPAN>유목민족의 관점에서는 대병력이었지만 중국의 한족에 비해서는 미미한 숫자였다<SPAN lang=EN-US>. </SPAN>또한 인구 전체로도 몽골족은 약<SPAN lang=EN-US> 1</SPAN>백만에서<SPAN lang=EN-US> 2</SPAN>백만 가량으로 추정되지만 한족은<SPAN lang=EN-US> 2</SPAN>천만 명에 이르렀다<SPAN lang=EN-US>. </SPAN>이러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병은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역량을 과시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그가 죽었을 때<SPAN lang=EN-US>, </SPAN>분할상속의 부족풍속을 따라 몽골제국은<SPAN lang=EN-US> 4</SPAN>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SPAN lang=EN-US>. </SPAN>각 지역은 왕이란 뜻의 <SPAN lang=EN-US>‘</SPAN>칸<SPAN lang=EN-US>(</SPAN>汗<SPAN lang=EN-US>)’</SPAN>을 세우고 독자적인 통치권을 형성했다<SPAN lang=EN-US>. </SPAN>이러한 분열상은 거대한 몽골제국이 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는 원인이 됐다<SPAN lang=EN-US>. </SPAN>우선 종교적으로 몽골제국의 칸들은 분열상을 보였다<SPAN lang=EN-US>. </SPAN>중국의 황실인 원<SPAN lang=EN-US>(</SPAN>元<SPAN lang=EN-US>)</SPAN>은 불교를 수용했으나 일부 한국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징기즈칸에 의해 시작된 중국의 통일과업은 마침내 그의 손자 쿠빌라이<SPAN lang=EN-US>(1215~1294</SPAN>년<SPAN lang=EN-US>)</SPAN>에 의해 완성되었다<SPAN lang=EN-US>. 1279</SPAN>년 중국 남부를 장악했던 한족 왕조인 남송을 무찌르고<SPAN lang=EN-US>, </SPAN>몽골제국이 중국을 재통일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족은 남송을 격파하기에 앞서<SPAN lang=EN-US> 1271</SPAN>년 원<SPAN lang=EN-US>(</SPAN>元<SPAN lang=EN-US>)</SPAN>을 세웠다<SPAN lang=EN-US>. </SPAN>지금의 북경에 대도<SPAN lang=EN-US>(</SPAN>大都<SPAN lang=EN-US>)</SPAN>라는 명칭의 수도를 세우고 본격적인 중국 지배에 들어갔다<SPAN lang=EN-US>. </SPAN>원은<SPAN lang=EN-US> 1368</SPAN>년 명<SPAN lang=EN-US>(</SPAN>明<SPAN lang=EN-US>)</SPAN>에 의해 붕괴될 때까지 중국을 약<SPAN lang=EN-US> 1</SPAN>세기에 걸쳐 통치했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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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STRONG>“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다<SPAN lang=EN-US>”<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TRONG></SPAN></P><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몽골로 돌아온 징기즈칸은<SPAN lang=EN-US> 1225</SPAN>년 겨울부터<SPAN lang=EN-US> 1226</SPAN>년 여름까지 오르콘강의 지류인 툴라강의 막사에서 보냈다<SPAN lang=EN-US>. </SPAN>이제 북경에서 볼가강까지의 세계가 그 앞에서 떨었다<SPAN lang=EN-US>. </SPAN>정복자는 호라즘 문제를 해결하자 탕구트<SPAN lang=EN-US>(</SPAN>서하<SPAN lang=EN-US>)</SPAN>를 응징하기로 하였다<SPAN lang=EN-US>. </SPAN>보통은 대원정의 전후에<SPAN lang=EN-US> 2</SPAN>년간의 준비와 휴식을 주었는데 징기즈칸은<SPAN lang=EN-US> 1226</SPAN>년 곧바로 탕구트 원정에 나섰다<SPAN lang=EN-US>. </SPAN>탕구트는 신하국이었음에도 호라즘 정벌전에 지원군 파견을 거절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이 금나라 정벌에 군사력을 집중한 사이 탕구트에서는<SPAN lang=EN-US> 1211</SPAN>년 쿠데타가 일어났었고 새로 즉위한 신종은 서정을 위한 몽골의 출병요청을 거절했다<SPAN lang=EN-US>. </SPAN>더욱이 탕구트는<SPAN lang=EN-US> 1225</SPAN>년에는 금과 형제지국의 동맹관계를 회복하여 항몽연합전선을 꾀하였지만 서정에 골몰했던 몽골은 여유가 없었다<SPAN lang=EN-US>. 1223</SPAN>년 무칼리가 죽자 잃었던 땅 일부를 다시 회복한 금나라를 재정복하기 위해서도 몽골은 감숙<SPAN lang=EN-US>, </SPAN>알라산<SPAN lang=EN-US>, </SPAN>오르도스를 직접 지배해야만 했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1225</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년 가을 대장 아타치가 이끌고 출정한 서로군은 신장의 서부에서 위구르 지역을 통과해 하서주랑을 따라 하란산맥 서쪽지역을 공략해 갔고<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 자신은 이듬해<SPAN lang=EN-US> 2</SPAN>월 동로군을 이끌고 남하해 직접 하란산맥 동쪽으로 나와 탕구트의 복판을 향해 쳐들어갔다<SPAN lang=EN-US>. 1226</SPAN>년<SPAN lang=EN-US> 11</SPAN>월 아타치의 서로군과 합세한 징기즈칸의 군대가 서하의 배후도시인 서평부<SPAN lang=EN-US>(</SPAN>영주<SPAN lang=EN-US>)</SPAN>를 포위하자 탕구트는 노장 명외영공에게 병력<SPAN lang=EN-US> 10</SPAN>만 명을 주어 이를 구원하게 했다<SPAN lang=EN-US>. </SPAN>황하의 얼음판 위에서 벌인 양측의 최후 결전은 결국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다<SPAN lang=EN-US>. </SPAN>탕구트가 농성전을 꾀하자 징기즈칸은 주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금의 서경을 선제 공격했다<SPAN lang=EN-US>. </SPAN>금의 탕구트에 대한 원군 파견의 여지를 없앤 것이다<SPAN lang=EN-US>. <SPAN lang=EN-US>1227</SPAN>년초 징기즈칸은 고비사막을 건너던<SPAN lang=EN-US> 중에 </SPAN>진군을 멈추고 야생마를 사냥했다<SPAN lang=EN-US>. </SPAN>갑자기 야생마들이 돌진해오자 징기즈칸의 말이 놀라 뛰어올랐다<SPAN lang=EN-US>. </SPAN>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지만 징기즈칸은 탕구트와 전쟁을 계속했다<SPAN lang=EN-US>. </SPAN></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lang=EN-US>1227</SPAN>년 봄 몽골은 황하 곁에 있는 수도 흥경<SPAN lang=EN-US>(</SPAN>영하<SPAN lang=EN-US>)</SPAN>을 포위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은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무자비하였다<SPAN lang=EN-US>. </SPAN>주민들은 헛되게 몽골을 피하여 산으로 동굴로 숨었다<SPAN lang=EN-US>. </SPAN>벌판은 사람의 뼈로 뒤덮였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그러나 이때 징기즈칸은 낙마로 인한 병이 깊어져 죽음이 가까웠음을 깨달았다<SPAN lang=EN-US>. 1227</SPAN>년 여름 흥경이 포위되어있는 동안 징기즈칸은 오늘날의 평량 서북에 해당하는 용덕의 청수하 지역 육반산의 남록에 하영하면서 오고타이와 톨루이를 불러들였다<SPAN lang=EN-US>. “</SPAN>내 병은 치료될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하니<SPAN lang=EN-US>, </SPAN>진실로 너희 가운데 하나가 군주의 지위와 제국의 권력을 수호하고 튼튼한 기초를 다져 권좌를 높여야 한다<SPAN lang=EN-US>. </SPAN>만약 나의 아들 모두가 칸이 되고 군주가 되려고 할 뿐 아무도 상대방에게 복종하지 않으려 한다면<SPAN lang=EN-US>, </SPAN>그것은 마치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이야기와 같이 될 것이다<SPAN lang=EN-US>”</SPAN>라고 한 뒤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인정하도록 하였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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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제베와 수베테이의 페르시아<SPAN lang=EN-US>, </SPAN>러시아 침공</SPAN></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호라즘샤 무하마드가 죽은 뒤에도 제베와 수베테이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진군하여 라이를 약탈한 뒤 하마단을 항복시켰다<SPAN lang=EN-US>. </SPAN>그 뒤 잔잔을 파괴하였고<SPAN lang=EN-US>, </SPAN>카즈빈의 주민들은 학살되었다<SPAN lang=EN-US>. </SPAN>계속하여 한겨울에 무간평원을 가로질러 그루지아 기사단과 맞서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수베테이는 이들을 제베가 있는 매복장소로 유인하여 괴멸시키고 그루지아 남부지방으로 짓쳐 들어갔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포로들을 앞세우고 성채공격을 하였으며 도시가 함락돼 주민학살이 끝난 뒤에 그곳을 떠나는 체 하다가 회오리바람처럼 되돌아와 도망쳤던 자들의 목을 베었다<SPAN lang=EN-US>. </SPAN>그런 후 몽골군은 아제르바이잔으로 돌아가 샤마카를 약탈하고 이곳을 지나 코카서스산맥을 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코카서스산맥을 넘어 북쪽 스텝으로 내려온 제베와 수베테이는 그 지역민인 알란<SPAN lang=EN-US>, </SPAN>레즈기<SPAN lang=EN-US>, </SPAN>시르카스<SPAN lang=EN-US>, </SPAN>그리고 킵차크 투르크인들과 충돌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먼저 투르크<SPAN lang=EN-US>-</SPAN>몽골의 형제애에 호소하고 약탈물의 일부를 주어 킵차크인들이 배신하도록 한 후 다른 지역민들을 하나씩 차례로 격파하고<SPAN lang=EN-US>, </SPAN>마지막에는 킵차크인까지 격파하여 약탈물을 되찾아 갔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패배한 킵차크인들은 루시 공작들에게 호소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리하여 여러 제후들이 이끄는<SPAN lang=EN-US> 8</SPAN>만의 러시아군이 드네프르강을 따라 내려왔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러시아군이 지쳐 널리 분산될 때까지 후퇴하다가 아조브해 북방의 칼카 강가에서 갈리치의 왕자와 킵차크인들을 격파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어서 몽골군은 크리미아의 수닥과 솔다이아에 있던 제노아인들의 창고들을 털었으며 흑해변에서 겨울을 지낸 후 볼가강을 건너 카마강가의 불가르와 우랄산맥의 캉그리를 격파한 후 원정을 끝내고 시르다리아강의 북부 초원에서 징기즈칸의 본군과 합류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은 개선한 후<SPAN lang=EN-US>, </SPAN>유목지역을 여러 아들과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SPAN lang=EN-US>. </SPAN>즉<SPAN lang=EN-US>, </SPAN>몽골 본토는 징기즈칸 자신의 직할지로 하여<SPAN lang=EN-US>, </SPAN>넷째 아들인 톨루이에게 잇도록하고<SPAN lang=EN-US>, </SPAN>큰아들 주치에게는 카스피해와 아랄해 북방의 영토<SPAN lang=EN-US>, </SPAN>즉 남 러시아의 킵차크 초원지대를 주었으며<SPAN lang=EN-US>, </SPAN>둘째 아들인 차가타이에게는 카라키타이의 옛 땅인 중앙 아시아를 나누어주었다<SPAN lang=EN-US>. </SPAN>또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에게는 일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외몽고 서부에서 천산산맥에 걸친 옛 나이만땅을 나누어주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동부 몽골고원과 만주지방은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남방의 농경지대는 황금씨족의 공유재산으로 하고 거기에 다루가치<SPAN lang=EN-US>(</SPAN>총독<SPAN lang=EN-US>)</SPAN>와 주둔군을 배치하여 치안유지와 징세를 맡게 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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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사마르칸드의 함락으로 전쟁의 승패는 결정되었다<SPAN lang=EN-US>. </SPAN>제베와 수베테이에게 쫓긴 호라즘샤는 추격을 피해 이곳 저곳으로 떠돌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타르칸 카툰 역시 마잔다란의 조그만 요새에 피신했으나<SPAN lang=EN-US> 4</SPAN>개월간에 걸친 몽골군의 포위로 식수가 떨어져 항복하고 말았다<SPAN lang=EN-US>. </SPAN>호라즘샤의 자식들은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분배되었으며<SPAN lang=EN-US>, </SPAN>타르칸 카툰은 몽골에 있는 징기즈칸의 본영으로 이송되어 모욕 속에 살게 되었다<SPAN lang=EN-US>. <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1220</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년 가을부터 징기즈칸은 새롭게 편성된 회회포군단과 정복지에서 모집한 보병을 이용하여 호라즘의 다른 도시들을 비교적 쉽게 함락시켰으나 호라즘의 옛 수도 우르겐치는 징기즈칸의 두 아들 주치와 차가타이가 매달려 공격을 했으나<SPAN lang=EN-US> 6</SPAN>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사태의 진상이 두 형제간의 갈등임을 파악하고 오고타이를 총대장으로 보내 포위작전을 총 지휘하게 하였다<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는 먼저 형들의 불화를 해소하고 군대의 규율을 회복한 후<SPAN lang=EN-US> 1221</SPAN>년<SPAN lang=EN-US> 4</SPAN>월 성벽을 타고 넘어 성내로 들어가 함락시켰다<SPAN lang=EN-US>. </SPAN>이것으로 오고타이야 말로 몽골제국을 통치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주치는 모든 시민들에게 성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였다<SPAN lang=EN-US>. </SPAN>공예가와 기술자들은 따로 한 무리를 만들어 정렬시켰다<SPAN lang=EN-US>. </SPAN>그런 후 일반시민들은 몽골군의 각부대 사이에 분배되어 칼<SPAN lang=EN-US>, </SPAN>도끼<SPAN lang=EN-US>, </SPAN>활로 학살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 학살을 면한 자는 노예가 된 젊은 여자와 어린이들뿐이었다<SPAN lang=EN-US>. </SPAN>이후 몽골군은 시내를 약탈하고 아무다리아강의 제방을 무너뜨려 시내에 숨어있던 자들을 익사시켰다<SPAN lang=EN-US>. </SPAN>이리하여 우르겐치는 완전히 폐허로 되었다<SPAN lang=EN-US>. </SPAN>결국 몽골은<SPAN lang=EN-US> 1</SPAN>년반 사이에 트랜스옥시아나에서 호라즘 세력을 몰아냈다<SPAN lang=EN-US>. </SPAN>이 전쟁에서 영웅적인 행위는 호라즘에 많았으나 조직과 지휘의 통일성 그리고 규율에서 몽골이 크게 우세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몽골군이 트랜스옥시아나를 정복하는 동안 호라즘샤 무하마드 2세는 발흐로 도망쳤다가 서부 호라산의 니샤푸르로 피신하였다<SPAN lang=EN-US>. </SPAN>계속하여 그는 자기 영토의 반대편 끝인 이라키아잠의 서북부 카즈빈으로 내달렸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제베와 수베테이가 지휘하는 기병 분견대로 그를 추격하도록 하였다<SPAN lang=EN-US>. </SPAN>제베와 수베테이가 접근하자 발흐는 투항하여 위난을 면하고 통치자를 영접하였다<SPAN lang=EN-US>. </SPAN>한시가 급한 제베는 니샤푸르도 위임통치 정도로 상황을 끝냈으나 수베테이는 투스<SPAN lang=EN-US>(</SPAN>마쉬하드<SPAN lang=EN-US>), </SPAN>담간<SPAN lang=EN-US>, </SPAN>삼난을 약탈하였다<SPAN lang=EN-US>. </SPAN>두 장군은 계속 무하마드를 추격하여 이라키아잠으로 들어가 라이를 공격한 후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SPAN lang=EN-US>, </SPAN>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SPAN lang=EN-US>. </SPAN>이어 하마단을 전력 질주하여 통과한 후 카룬에 이르러 무하마드 2세를 잡으려다 놓치자 그들은 분풀이로 잔잔과 카즈빈을 파괴하였다<SPAN lang=EN-US>. </SPAN>무하마드 2세는 카스피해의 작은 섬 아베스쿤으로 도망쳤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카스피해 연안에서 배를 만들어 그를 추격할 채비를 갖추었으나 무하마드 2세는 이미 거기서 지쳐 죽었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호라즘샤의 죽음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SPAN lang=EN-US>. </SPAN>호라즘샤 무하마드 2세의 후계자 자랄 알딘 망구베르티는 나사에서 몽골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쳐 트랜스옥시아나와 호라산의 재난에서 벗어났다<SPAN lang=EN-US>. </SPAN>그는 호라산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산중의 가즈니로 피신하여 새로이 군대를 조직하였다<SPAN lang=EN-US>. </SPAN>자연 전장은 동부이란의 호라산과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졌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SPAN lang=EN-US> 1221</SPAN>년 봄 아무다리아강을 건너 호라즘 잔당이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호라산을 정복하기 위해 나섰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칙령에서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천명하고<SPAN lang=EN-US>, “</SPAN>누구라도 항복하는 자는 그의 처자식과 집안 사람들을 살려줄 것이지만<SPAN lang=EN-US>, </SPAN>항복하지 않으면 처자식은 물론 친족 모두를 몰살시킬 것<SPAN lang=EN-US>”</SPAN>이라 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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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TRONG>호라즘을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하다<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TRONG></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금의 수도를 함락한 후<SPAN lang=EN-US> 1216</SPAN>년 몽골로 돌아온 징기즈칸은 그가 없는 틈을 타서 그가 복속시켰던 부족들<SPAN lang=EN-US>, </SPAN>특히 나이만족의 반란이 점차 조직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느꼈다<SPAN lang=EN-US>. </SPAN>이들 반란세력은 호라즘의 간접지원을 받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SPAN lang=EN-US> 1216</SPAN>년부터<SPAN lang=EN-US> 2</SPAN>년간 전 몽골군에게 휴식을 주어 다음의 원정준비를 시켰다<SPAN lang=EN-US>. </SPAN>서방으로는 첩보<SPAN lang=EN-US>, </SPAN>계략을 목적으로 하는 통상단을 보냈다<SPAN lang=EN-US>. </SPAN>이즈음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왕래하는 대상들은 여행을 통해 지리적인 특징<SPAN lang=EN-US>, </SPAN>군대의 배치<SPAN lang=EN-US>, </SPAN>주민들의 분위기<SPAN lang=EN-US>, </SPAN>궁정내의 당파 등에 대해 매우 유용한 정보를 서로 주고 받고 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lang=EN-US>1218</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년 호라즘의 교역 사절단이 징기즈칸을 방문하자 그는 답례로 낙타에 귀중품을 실어<SPAN lang=EN-US> 450</SPAN>명의 사절단을 보냈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호라즘 땅 오트랄에 도착하면서부터 징기즈칸의 권위와 종교적인 관용<SPAN lang=EN-US>, </SPAN>몽골군의 강인함<SPAN lang=EN-US>, </SPAN>그리고 반항하는 자들이 받는 비참한 처벌에 대해 주민들에게 선전하고 다니자 국경 수비대장 이날축은 이들을 스파이 집단으로 몰아 모두 죽였다<SPAN lang=EN-US>. </SPAN>이 사실을 전해들은 징기즈칸은 몽골의 특명사절을 보내 이를 따졌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호라즘샤는 그 중<SPAN lang=EN-US> 1</SPAN>명을 살해하고<SPAN lang=EN-US>, </SPAN>다른 사람의 수염을 밀어버리고 쫓아냈다<SPAN lang=EN-US>. </SPAN>몽골인들은 전쟁과 외교를 같은 무게로 보았으며 사신의 처형은 곧 전쟁을 의미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class=tit16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호라즘<SPAN lang=EN-US>(Khwarezm)</SPAN>은</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SPAN class=text131><SPAN style="mso-bidi-font-size: 9.0pt; mso-ansi-font-size: 9.0pt" lang=EN-US>1077</SPAN></SPAN><SPAN class=text131><SPAN style="mso-bidi-font-size: 9.0pt; mso-ansi-font-size: 9.0pt">년에 아무다리야강 하류 유역<SPAN lang=EN-US>, </SPAN>지금의 히바에 세워져<SPAN lang=EN-US> 1231</SPAN>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였다<SPAN lang=EN-US>. </SPAN></SPAN></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셀주크왕조의 부장<SPAN lang=EN-US>(</SPAN>部將<SPAN lang=EN-US>) </SPAN>아누시티긴의 아들 쿠트브 웃딘 무하마드<SPAN lang=EN-US>(</SPAN>재위<SPAN lang=EN-US> 1097~1127</SPAN>년<SPAN lang=EN-US>)</SPAN>가 술탄에서 독립하여 우르겐치를 수도로 호라즘을 건설하였다<SPAN lang=EN-US>. </SPAN>아라비아인은 후와리즘이라 부르고 원<SPAN lang=EN-US>(</SPAN>元<SPAN lang=EN-US>)</SPAN>나라 사서에는 화자자모<SPAN lang=EN-US>(</SPAN>花刺子模<SPAN lang=EN-US>)</SPAN>라 기록되어 있다<SPAN lang=EN-US>. </SPAN>그 후 동방의 서요<SPAN lang=EN-US>(</SPAN>西遙<SPAN lang=EN-US>)</SPAN>와 연합하여 이란<SPAN lang=EN-US>, </SPAN>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여 대국이 되었다<SPAN lang=EN-US>.<BR><BR></SPAN></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원정에 앞서 징기즈칸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쿠릴타이에서 후계자 문제를 정리하기 위하여 징기즈칸이 큰아들 주치를 부르자 둘째아들 차가타이가 불같이 나오며<SPAN lang=EN-US> “</SPAN>아버지는 이 더럽고 추잡한 메르키트 개자식에게 제국을 넘기려는 것입니까<SPAN lang=EN-US>?”</SPAN>라고 외쳤다<SPAN lang=EN-US>. </SPAN>그러자 얼굴이 벌개진 주치는<SPAN lang=EN-US> “</SPAN>아버지가 아직 아무 말씀도 없으신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SPAN lang=EN-US>?”</SPAN>라고 화를 냈다<SPAN lang=EN-US>. </SPAN>두 왕자가 멱살을 붙잡고 맞붙어 싸우게 되자 주위의 친족들과 장군들이 이들을 뜯어 말렸다<SPAN lang=EN-US>. </SPAN>주치의 계승은 분쟁을 낳게될 것이 확실하였다<SPAN lang=EN-US>. </SPAN>장내가 겨우 진정되자 징기즈칸이 입을 열었다<SPAN lang=EN-US>. “</SPAN>주치를 왜 나쁘게 말하는가<SPAN lang=EN-US>? </SPAN>큰아들은 주치가 아닌가<SPAN lang=EN-US>? </SPAN>앞으로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SPAN lang=EN-US>”</SPAN>라고 질책하였다<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는 바로 밑동생 오고타이 곁으로 가면서 대답하였다<SPAN lang=EN-US>. “</SPAN>큰 아들인 주치와 저 둘은 앞으로도 아버지께 힘을 보태겠습니다<SPAN lang=EN-US>. 3</SPAN>남인 오고타이야 말로 마음이 넓으니 그를 후계자로 하십시오<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의 말에 징기즈칸은<SPAN lang=EN-US> “</SPAN>주치도 의견을 말하라<SPAN lang=EN-US>”</SPAN>하자<SPAN lang=EN-US> “</SPAN>저도 한마음으로 아버지께 힘을 바치겠습니다<SPAN lang=EN-US>”</SPAN>라 하였다<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의 의견은 어떤가<SPAN lang=EN-US>?” “</SPAN>황망하오나 저는 진력을 다하겠습니다<SPAN lang=EN-US>.” </SPAN>일찍이 징기즈칸은<SPAN lang=EN-US> “</SPAN>규범과 지혜를 배우려는 자는 차가타이에게 가고<SPAN lang=EN-US>, </SPAN>관용과 은사<SPAN lang=EN-US>, </SPAN>그리고 부귀를 구하는 자는 오고타이에게 가라<SPAN lang=EN-US>. </SPAN>용기와 명예<SPAN lang=EN-US>, </SPAN>그리고 불퇴전의 정복의지를 찾는 자는 톨루이를 따라라<SPAN lang=EN-US>” </SPAN>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후계자로서 능력보다는 포용력이 있는 오고타이에게 제국을 맡기기로 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로서 징기즈칸은 주치가 메르키트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겉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주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SPAN lang=EN-US>. </SPAN>그는 자신의 상처를 들쑤시는 차가타이에 대하여 두고두고 한을 품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도 후계자를 논할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하게 충돌한 이후 주치를 전과 같이 대하기가 힘들었다<SPAN lang=EN-US>. </SPAN>두 사람은 마음속에 커다란 응어리를 갖게 되었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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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STRONG>서요<SPAN lang=EN-US>(</SPAN>카라키타이<SPAN lang=EN-US>)</SPAN>와 중앙아시아 정복<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TRONG></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은<SPAN lang=EN-US> 1216</SPAN>년 자신의 숙적이던 메르키트족 톡토아의 동생 호두가 부민들을 모아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몽골본토로 돌아왔다<SPAN lang=EN-US>. 1217</SPAN>년 메르키트족에 대한 출정 준비가 완료되자<SPAN lang=EN-US>, </SPAN>그는 수베테이와 토쿠차르에게 메르키트족을 전부 죽여버릴 것을 명령하였고 이에 따라 패배한 메르키트족은 톡토아의 막내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살해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어서 삼림민이던 호리 투마트족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였다<SPAN lang=EN-US>. </SPAN>코르치는 자신의 예언대가로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으로부터 투마트족 출신의 미녀<SPAN lang=EN-US> 30</SPAN>명을 차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투마트족 정벌에 나섰으나 거기서 거꾸로 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SPAN lang=EN-US>. </SPAN>이에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은 삼림민의 행태를 잘 알고있던 오이라트족의 수령 쿠두카를 보냈는데 그 역시 포로가 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렇게되자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은 보로쿨을 보냈다<SPAN lang=EN-US>. </SPAN>그는 본대와 떨어져 앞서가다가 밤중에 투마트초병의 급습을 받아 살해되고 말았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분노에 찬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보로쿨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려하였으나<SPAN lang=EN-US>, </SPAN>주위의 만류로 되르벤족 출신의 한 장군을 뽑아 엄격한 지시를 내리고 영원한 하늘에 대해 기도를 올린 뒤 출정시켰다<SPAN lang=EN-US>. </SPAN>투마트족은 잔치를 벌이던 도중 습격을 받아 패배하였고<SPAN lang=EN-US>, </SPAN>투마트족 수령의 둔영에 잡혀있던 코르치와 쿠두카는 풀려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코르치는 약속대로<SPAN lang=EN-US> 30</SPAN>명의 미녀를 차지하였고<SPAN lang=EN-US>, </SPAN>쿠두카는 투마트족 수령의 부인인 보도쿠이 타르쿤을 차지하였다<SPAN lang=EN-US>. </SPAN>또<SPAN lang=EN-US> 100</SPAN>명의 투마트인이 보로쿨의 장례식에 바쳐졌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투마트족에 대한 원정시 몽골군에게 원군을 보내기를 거부한 키르기즈족 등 삼림민들의 독립의지를 완전히 꺾어놓기 위해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은 큰아들 주치를 보냈다<SPAN lang=EN-US>. </SPAN>주치는 쿠두카가 오이라트가 있는 곳을 안내하자 시크시트에서 그들을 복속시켰다<SPAN lang=EN-US>. </SPAN>그뒤 주치는 오이라트<SPAN lang=EN-US>, </SPAN>부리야트를 비롯한 다른 삼림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키르기즈도 굴복시켰다<SPAN lang=EN-US>. </SPAN>복속한 부족의 수령들은 충성의 표시로 하얀 말과 하얀 매 그리고 검은 담비털을 가져왔고<SPAN lang=EN-US>, </SPAN>주치는 오이라트와 키르기즈의 수령들을 데리고 돌아왔다<SPAN lang=EN-US>.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은 쿠두카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 그의 아들들에게 황녀들을 아내로 주었고 주치에게는 삼림민을 주고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다<SPAN lang=EN-US>. “</SPAN>나의 큰아들이여<SPAN lang=EN-US>, </SPAN>너는 처음으로 집을 나서서 일을 아주 잘 끝냈다<SPAN lang=EN-US>. </SPAN>너는 행운의 삼림민들을 복속시킨 뒤 그들의 말과 사람을 해치지도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의 적중에 유일한 생존자가 있었으니<SPAN lang=EN-US>, </SPAN>그는 바로 나이만족 타양칸의 아들인 쿠출루크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이르티쉬 강가에서의 패전 이후 고향땅인 알타이에서 아버지와 백성들을 잃자 메르키트의 잔당들과 함께 동투르키스탄으로 갔지만 위그르의 이디쿠트인 바르축에게도 몰려 서요<SPAN lang=EN-US>(</SPAN>카라키타이<SPAN lang=EN-US>)</SPAN>의 군주 구르칸에게로 도망쳤다<SPAN lang=EN-US>. </SPAN>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은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침입 이전에 서위그르<SPAN lang=EN-US>, </SPAN>서요<SPAN lang=EN-US>, </SPAN>호라즘 등 세 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투르크계 왕조 서위그르는 톈산<SPAN lang=EN-US>(</SPAN>천산<SPAN lang=EN-US>)</SPAN>산맥 동쪽의 동투르키스탄에<SPAN lang=EN-US>, </SPAN>서요는 탈라스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고<SPAN lang=EN-US>, </SPAN>호라즘은 이란화된 투르크계 왕조로서 서투르키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서요<SPAN lang=EN-US>(</SPAN>카라키타이<SPAN lang=EN-US>)</SPAN>는 중국의 거란이<SPAN lang=EN-US> 1125</SPAN>년 멸망한 후 거란족의 지도층이 서진<SPAN lang=EN-US>, </SPAN>톈산북로를 통과하여 돌궐<SPAN lang=EN-US>(</SPAN>투르크<SPAN lang=EN-US>)</SPAN>계 칼라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왕조를 재건한 것이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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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거란의 독립운동<BR><BR></SPAN></B><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몽골과 금나라의 전투에서 몽골군의 우위는 요동지방에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은 또 금나라에 타격을 주었다<SPAN lang=EN-US>. </SPAN>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하자 금나라는 피지배민인 거란족<SPAN lang=EN-US>(</SPAN>키타이족<SPAN lang=EN-US>)</SPAN>이 몽골과 내통할 것을 두려워하여 거란인<SPAN lang=EN-US> 1</SPAN>호당 여진인<SPAN lang=EN-US> 2</SPAN>호에 끼워 살게 하였다<SPAN lang=EN-US>. </SPAN>의심을 받는다고 느낀 거란족 약<SPAN lang=EN-US> 10</SPAN>만이<SPAN lang=EN-US> 1212</SPAN>년 거란제국의 왕족이었던 야율유가를 도원수로 하여 요동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몽골군에 동맹을 요청하였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가 직접 감시하는데 대한 공개적인 반란이었다<SPAN lang=EN-US>. </SPAN>몽골은 즉각 사자를 보내 야율유가와 교섭한 후 쌍방의 대표가 금산에 올라가 백색 말과 소를 제물로 바치고 북쪽을 향하여 활을 꺾는 동맹의식을 행하고 제베가 거느리는 군대를 파견하였다<SPAN lang=EN-US>. </SPAN>여기서 거란군과 제베의 군사가 합세해서 금나라 요양을 공략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제베는 계략을 써 후퇴를 가장해서 주위에 복병을 남겨 두어 적이 안심한 틈을 타 일제히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lang=EN-US>1213</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년 춘삼월 금나라 완안호사는 본대를 이끌고 걸석열환단은 지대를 인솔하여 요동으로 진격하였다<SPAN lang=EN-US>. </SPAN>전장은 장춘 부근으로 금나라의 지대는 승리하였으나 본대가 패하여 금나라의 국경은 서북의 옹구트족 쪽과 마찬가지로 동북의 거란족 쪽으로도 무방비상태가 되었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는 패장 완안호사에 대신하여 포선만노를 요동군의 사령관에 임명하였다<SPAN lang=EN-US>. </SPAN>포선만노는 야율유가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으며 그의 부장격이었던 완안철가와도 대립하여 그를 처형하고 나서 이 죄를 물을까 두려워하여 남쪽 개봉으로 천도한 금나라에 반기를 들어 대진국을 세우고 스스로를 천왕이라 불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패전을 계속하는 금나라에 실망한 요동의 여진인은 포선만노의 독립을 지지하였다<SPAN lang=EN-US>. </SPAN>포선만노의 적은 야율유가의 거란 정권과 금나라의 장군 걸석열환단이었다<SPAN lang=EN-US>. </SPAN>포선만노는 금나라 군에 밀려 동북으로 후퇴하여 틀어 박혔다<SPAN lang=EN-US>. </SPAN>그후 포선만노 정권은 몽골에게 복속과 반역을 반복하였는데 징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의 대에 멸망되어 요동에서 여진세력은 사실상 사라졌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한편 야율유가는 무칼리와 함께 케룰렌강 부근의 둔영지에서 징기즈칸을 만났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야율유가가 의를 따라 돌아왔다고 기뻐하며 그를 요동왕으로 공식 인정하고 그를 보좌하는 몽골인 부왕을 두었다<SPAN lang=EN-US>. </SPAN>위그르와 함께 거란은 몽골에 합류함으로서 몽골제국 안에서 자치권을 얻었다<SPAN lang=EN-US>. </SPAN>그의 부하들은 그에게 제왕을 칭하라고 권하였으나 신중한 그는 이것을 물리치고 죽을 때<SPAN lang=EN-US>(1220</SPAN>년<SPAN lang=EN-US>)</SPAN>까지 몽골에 충성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따로 자립하였지만<SPAN lang=EN-US> 70</SPAN>여일 후 야율유가<SPAN lang=EN-US>-</SPAN>몽골 연합군에게 토벌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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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id=SG_ArticleSubHeadLine class=articleView-M-Ts>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악기… 사람의 음성과 비슷해 놀라워<BR>흐느끼는 듯한 슬픈 소리 호소력</DIV>
<DIV id=SG_ArticleBody class=articleView2>
<DIV style="DISPLAY: none" id=SG_ArticleID class=articleView-T>20110303004282</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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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 리더십<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B></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① 첫 번째 징기즈칸의 리더십 중에 주목 받을 점은 그의<SPAN lang=EN-US> '</SPAN>웅대한 비전'이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일찍이 과거에도 없었고 누구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가능하게 만든 대단한 비전이다<SPAN lang=EN-US>. </SPAN>그의 비전이 처음부터 컸던 것은 아니었다<SPAN lang=EN-US>. 17</SPAN>살의 어린 소년 테무진이 타타르족의 습격으로 아버지를 잃고 그의 부족은 모조리 흩어 졌으며 자신은 포로로 잡혀 끌려가는 신세에 처해졌다<SPAN lang=EN-US>. </SPAN>이때 그가 가진 목표는 '흩어진 부족을 되찾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다<SPAN lang=EN-US>. '</SPAN>할 일이 있는 한 나는 죽을 수 없다'라는 그의 말과 같이 온갖 모험과 역경을 거쳐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루었는데<SPAN lang=EN-US>, </SPAN>테무진의 결론은 그의 부족들이 <SPAN lang=EN-US>‘</SPAN>공동의 목표<SPAN lang=EN-US>’</SPAN>가 있으니 더 잘 뭉친다는 것이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그 같은 공동의 목표는 소박하거나 곧 이룩될 만한 작은 것에서는 별반 효과가 없었으며<SPAN lang=EN-US>, </SPAN>원대야망한 것이라야 사람들이 큰 힘을 낸다는 것이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 리더십의 면면에는 한가지 공동목표가 달성되기가 무섭게 곧 다음의 새로운 공동목표를 만들어 쉬지 않고 달려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그의 부족을 이끌어 갔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그 비전은 나라를 만드는 것<SPAN lang=EN-US>, </SPAN>주변국가로부터의 위협을 없애는 것<SPAN lang=EN-US>, </SPAN>아예 중원을 경영하는 것<SPAN lang=EN-US>, </SPAN>나아가 천하를 통일하는 것<SPAN lang=EN-US>, </SPAN>그리고 그 천하는 중국 땅을 넘어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땅으로 계속 커져만 갔으며<SPAN lang=EN-US>, </SPAN>그 꿈들을 하나 하나 실현시켜 나갔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② 두 번째는 명분과 정당성의 확보이다<SPAN lang=EN-US>.<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부족들은 명예를 중시하고 이름 석자에 대한 오명을 몹시도 싫어한다<SPAN lang=EN-US>. </SPAN>항상 그들은 옳은 쪽으로 평가 받기를 원한다<SPAN lang=EN-US>. </SPAN>청군 아니면 백군인 상태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들은 정의의 편이라는 생각으로 싸우게 하도록<SPAN lang=EN-US>, </SPAN>같은 전쟁을 하더라도 명분이 없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SPAN lang=EN-US> 100</SPAN>만 대군을 칠 때도 그 명분은 나라를 물려 받지 못할 불효한 놈이 천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백성들에게는 일종의 해방전쟁이라는 명분을 걸고 땅을 빼앗거나 명분 없는 약탈을 자제시켰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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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금나라의 천도는 두 마음이 있다는 증거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노하여<SPAN lang=EN-US> 1214</SPAN>년 가을 사무카와 석말명안의 총 지휘하에 행동을 개시하였다<SPAN lang=EN-US>. </SPAN>완안복흥은 개봉에 위급을 고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의 진군이 알려지자 많은 성밖의 사람들이 성안으로 피난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의 전위 특수부대원들은 중국인 농부로 가장한 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밤낮없이 달려왔다<SPAN lang=EN-US>. </SPAN>말들이 달리다 지쳐 쓰러지자 마지막에는 걸어서 중도로 들어가는 피난민 대열에 섞여 성문 앞에 도달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성문 앞에서 삼엄한 조사를 무사히 통과하였다<SPAN lang=EN-US>. </SPAN>군량을 가지고 오던 금나라의 증원군이 중도와 하간 사이의 패주에서 몽골군의 습격으로 격파되어 흩어지자 피난민으로 북새통을 이룬 중도는 식량이 동이나 인육을 먹는 형편이 되었다<SPAN lang=EN-US>.<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이윽고 몽골군이 중도로 접근하자 성문은 닫히고 파수병들은 방어태세로 들어갔다<SPAN lang=EN-US>. </SPAN>성안의 몽골 특수부대원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민가에 금나라군의 방어용 무기인 살상용 불기름으로 불을 놓기 시작하였으며 몽골군이 이미 시내까지 들어와 싸우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SPAN lang=EN-US>. </SPAN>시내의 이곳 저곳에서 시커먼 불기둥이 타오르고 민심이 흉흉해져 사람들은 관가와 저자거리를 털기 시작하였다<SPAN lang=EN-US>. </SPAN>병사들도 자리를 이탈하여 약탈과 강도<SPAN lang=EN-US>, </SPAN>강간<SPAN lang=EN-US>, </SPAN>살인에 끼어들어 중도는 생지옥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절망한 중도 유수 완안복흥은 자결해버렸으며 석말진충은 부하를 데리고 탈출하여 개봉에 들어갔으나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거란족 출신인 석말명안은 몽골군을 이끌고 입성하였고 당시 장성의 건너편 드론 노르 호수가의 환주에서 더위를 피하며 머물던 징기즈칸은 자신의 양자인 시기 쿠두쿠를 보내 성내의 재물을 환수케 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 뒤 중도는 한달 동안 약탈이 허용되었으며 수천명의 주민들이 죽고 도시전역이 화염 속에 소멸되었다<SPAN lang=EN-US>. </SPAN>당시 몽골인은 도시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금<SPAN lang=EN-US>, </SPAN>은<SPAN lang=EN-US>, </SPAN>보석의 약탈과 살육<SPAN lang=EN-US>, </SPAN>방화 등으로 도시를 파괴하였다<SPAN lang=EN-US>. 10</SPAN>세기의 거란이나<SPAN lang=EN-US> 12</SPAN>세기의 여진인은 최소한의 살육으로 왕조를 계승한 후 그들의 재산이 될 것은 파괴하지 않았으나 징기즈칸의 몽골인들은 무제한적 파괴만 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지금까지 금나라에 대한 몽골의 원정은 약탈전과 복수전의 성격을 띠어<SPAN lang=EN-US>, </SPAN>노예와 가축과 재물을 얻기 위한 유목민의 전투였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이제 거란과 한족출신 참모들의 영향으로 전쟁목적은 수정되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금나라 황제에게 함락된 모든 영토의 할양을 요구하였고<SPAN lang=EN-US>, </SPAN>아직 함락되지 않은 하북과 산동의 모든 지역을 바칠 것과<SPAN lang=EN-US>, </SPAN>황제는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하남 왕일 것을 명령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황하의 북측지역은 무정부상태로 되어 대소의 무장세력이 자생적으로 일어났다<SPAN lang=EN-US>. </SPAN>또 중앙의 명령을 받을 수 없었던 지방의 군단들은 독립군벌로 변해갔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의 고향 만주는 연락이 끊어져 속속 몽골에 집단 투항하였으며 몽골은 내몽골 초원과 예전 거란의 연운<SPAN lang=EN-US>16</SPAN>주를 손에 넣었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의 영역은 이제 그 새수도인 개봉 일원을 중심으로 섬서성의 일부 요새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리하여 금나라는 하남과 협서를 가진 지방정권으로 전락하였으며 몽골은 아시아 동방의 강자가 되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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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lang=EN-US>1211</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년은 금나라에게 악몽이었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SPAN lang=EN-US>. 1212</SPAN>년 가을 몽골군은 다시 돌아와 공세를 취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번에도 몽골은 많은 지역을 다시 석권하고 중도 다음으로 금에게 중요한 산서 북부의 서경<SPAN lang=EN-US>(</SPAN>대동<SPAN lang=EN-US>)</SPAN>을 포위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징기즈칸이 화살에 맞았기 때문에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퇴각하였다<SPAN lang=EN-US>. </SPAN>서경은 다시 금나라에게 돌아갔다<SPAN lang=EN-US>. </SPAN>몽골은 이러한 고전을 통하여 공성기법의 전문성과 공성공병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 문제는 결국 금나라에 적대적인 한족들을 징발하여 해결하였다<SPAN lang=EN-US>.<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lang=EN-US>1213</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년 가을 세 번째의 몽골 침략은 가공할 만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앞서 두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대 공세를 펴 결정적인 승리를 차지하였다<SPAN lang=EN-US>. </SPAN>야호령을 넘어 거침없이 진격하던 몽골군은 전과 달리 거용관 북구에서 진격을 멈췄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군이 거용관에 철제 관문을 달아 대비하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먼저 제베는 중앙 전위부대를 이끌고 거용관 관문 입구를 향해 쳐들어가는 척 하다가 곧 자기 휘하부대를 이끌고 허겁지겁 퇴각하였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 병사들은 그가 정말로 퇴각하는 줄 알고 추격해왔다<SPAN lang=EN-US>. </SPAN>유도작전을 위한 위장된 퇴각이었다<SPAN lang=EN-US>. </SPAN>제베는 적의 추격에 걸릴 듯 걸릴 듯하며 추격해오는 적을 멀리까지 유인해 갔다<SPAN lang=EN-US>. </SPAN>그들은 이렇듯 계략이 있는 줄도 모르고 깊숙히 추격해 갔다<SPAN lang=EN-US>. </SPAN>이때 퇴각하던 제베의 전위대가 갑자기 반격을 시작했다<SPAN lang=EN-US>. </SPAN>그 뒤쪽에는 징기즈칸이 직접 지휘하는 중앙군의 본대가 돌격해 왔다<SPAN lang=EN-US>. </SPAN>적의 시체는 나무토막처럼 쌓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적을 완전히 소탕한 몽골군은 회래에서 거용관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장악하였다<SPAN lang=EN-US>. </SPAN>즉 <SPAN lang=EN-US>7, </SPAN><SPAN lang=EN-US>8</SPAN>월에 걸쳐 광활한 일대를 지키는 요새도시, 화산으로 둘러싸여 노란 바람이 부는 선화를 점령하였고, 여기서 다시 톨루이를 공격선발대로 삼아 남동쪽으로 요새화된 보안을 크게 쳐부쉈다<SPAN lang=EN-US>. </SPAN>이로서 장가구와 북경을 연결하는 길이 장악되면서 승리의 전기가 마련되었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장가구 근처의 선덕부와 부주를 손에 넣었고<SPAN lang=EN-US>, </SPAN>위녕성의 방위를 지휘하던 유백림도 투항하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은 선덕에서의 승리를 시초로, 덕흥을 부수고 거용관의 북쪽입구에 육박하였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는 협상을 위해 징기즈칸을 알고 있던 거란인 석말령안을 보냈으나 그는 몽골측으로 돌아서 버렸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거용관에는 인적도 드물고 대낮에도 어두운<SPAN lang=EN-US> 22km</SPAN>의 산길이 뻗어 있었고, 양편에는 험준한 절벽인 천연적인 요새에 인공적인 성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SPAN lang=EN-US>. 적이 쳐들어 오기 전에 금나라는 </SPAN>이 장성의 하단문을 철제로 바꾸었고 지면에 장해물을 설치하였으며, 그리고 정예부대로 방위를 세웠다<SPAN lang=EN-US>. </SPAN>당시 금나라는<SPAN lang=EN-US> 12</SPAN>만 정도의 여진족 기병과 약 <SPAN lang=EN-US>45</SPAN>만의 한족 보병으로 구성된 <SPAN lang=EN-US>60</SPAN>만 대군을 보유하였고<SPAN lang=EN-US>, </SPAN>몽골 침공군의 병력은 다른 부족의 지원병 약<SPAN lang=EN-US> 1</SPAN>만을 포함하여<SPAN lang=EN-US> 6</SPAN>만<SPAN lang=EN-US>5</SPAN>천명 정도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병사는 그곳에서 제지되었다<SPAN lang=EN-US>.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징기즈칸은 거용관의 견고함을 보고 작전을 변경하였다<SPAN lang=EN-US>. </SPAN>즉 한 부대로 감시시키면서 자신들은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 비호령을 넘어 자형구(역주)를 쳤다<SPAN lang=EN-US>. </SPAN>이후 징기즈칸은 제베에게 명하여 경무장한 소부대를 이끌고 거용관 남구의 금군 본영을 기습케 하여, 남북 양쪽에서 협격토록 함으로써 거용관을 함락시켰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탁주로 내려왔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탁주를 취한 후 바로 중도로 진격하지 않고 군사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진격시켰다<SPAN lang=EN-US>. </SPAN>주치<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의 세아들은 우익군<SPAN lang=EN-US>, </SPAN>동생 카사르와 테무게 옷치긴은 좌익군<SPAN lang=EN-US>, </SPAN>칸 자신은 막내아들 톨루이와 함께 중군을 지휘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몽골의 우익군은 보정에서 태행산맥을 따라 하북성을 남하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하남성 북쪽에서 황하에 부딪치자 태행산맥의 남단을 서쪽으로 돌아 산서성으로 나왔다<SPAN lang=EN-US>. 그러면서</SPAN> 이들은 그 근처 도시를 하나 하나 점령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후 금나라의 중요한 거점인 고북고와 대동 등을 점령하였다<SPAN lang=EN-US>. </SPAN>대동은 만리장성이 두 줄로 되는 해발<SPAN lang=EN-US> 1300m</SPAN> 지점에 있는 성곽으로 산서성을 지키는 요지였다<SPAN lang=EN-US>. </SPAN>이 도시는 옛부터 난공불락이었으나 몽골인 특유의 병법에 의해 무너졌다<SPAN lang=EN-US>. 몽골 우익군은</SPAN>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으나<SPAN lang=EN-US>, </SPAN>약탈물을 북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다시 철수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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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케룰렌 하반에는<SPAN lang=EN-US> 1</SPAN>만명의 케식텐 외에도 몽골부족군<SPAN lang=EN-US> 12</SPAN>만명이 모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있을지도 모를 케레이트족이나 나이만족 등의 반란에 대비하여 콩기라트부의 타후차르에게<SPAN lang=EN-US> 2</SPAN>천명의 군대를 주어 고향에 남도록 한 뒤, 남은 전 복속 부족민들을 이끌고 고비사막을 건너 남하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SPAN lang=EN-US> 4</SPAN>만명의 우익군을 주치<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에게 주어 토르강에서 옹구트부 지역으로 남하하게 하고<SPAN lang=EN-US>, </SPAN>자신은 무칼리와 함께 중군을 이끌고 제베<SPAN lang=EN-US>, </SPAN>수베데이<SPAN lang=EN-US>, </SPAN>조치 카사르와 막내아들 톨루이에게 맡긴 좌익과 함께 총<SPAN lang=EN-US> 7</SPAN>만명이 케룰렌강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갔다<SPAN lang=EN-US>. </SPAN>춘<SPAN lang=EN-US> 3</SPAN>월에는 눈이 녹아 물을 얻을 수 있고 덥지 않아 대사막을 건너는 데에는 적합한 때였다<SPAN lang=EN-US>. 1211</SPAN>년<SPAN lang=EN-US> 5</SPAN>월 징기즈칸은 고비남쪽 내몽골 초원에 자리잡고 있는 동맹부족 옹구트 지구에 다다르자 행군을 멈추고 병사와 말을 쉬게 하였다<SPAN lang=EN-US>.<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옹구트족은 금나라와 주종관계에 있었지만 징기즈칸과는 나이만전에서부터 인연을 맺어왔던 부족이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SPAN lang=EN-US> 1206</SPAN>년의 대대적인 논공행상 때 그들 부족장을 새로운 몽골제국의 고관으로 대접하고 딸 아라가이 베키를 그들 족장의 세자 패요랍한테 시집을 보냈다<SPAN lang=EN-US>. </SPAN>옹구트족은 만리장성의 북방 접근로인 산서성 북부 외곽지대를 지키는 금나라의 파수병 노릇을 하였는데 이러한 정략결혼으로 옹구트는 징기즈칸에게 변경지역을 넘겨주었고 침공로를 열어주었으며 지원군도 보냈다<SPAN lang=EN-US>. 또한 </SPAN>난하 상류에 근거를 두고 징기즈칸에게 투신한 거란 호족 야율아해와<SPAN lang=EN-US> 야율</SPAN>독화 형제도 금나라 북방을 지키는 거란족 장군과 연락이 닿아 있었다<SPAN lang=EN-US>. </SPAN>당시 금나라의 정규군 맹안모극군은<SPAN lang=EN-US> 27</SPAN>만명이었고, 여기에 이민족으로 이뤄진 규군과 지방군인 화모군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몽골통일의 의미를 잘 모르는 새 황제는 주력을 남송경계에 배치하고 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난하 상류에 도착한 징기즈칸은 한여름을 그곳에서 보내고<SPAN lang=EN-US> 8</SPAN>월에 옹구트 부장 알라쿠시를 앞세워 대청산을 넘는 우익군을 기다렸다가 마침내 행동을 개시하였다<SPAN lang=EN-US>. </SPAN>야율아해가 선도한 우익군은 서경<SPAN lang=EN-US>(</SPAN>다퉁<SPAN lang=EN-US>, </SPAN>대동<SPAN lang=EN-US>)</SPAN>방면으로 공격하였고<SPAN lang=EN-US>, </SPAN>야율독화가 안내한 좌익군은 내몽골 초원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요충인 야호령으로 진격했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는 옹구트가 몽골군에 가담한 줄도 모르고 방책에 의지하여 안심하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뒤늦게 급보를 받은 금의 주력은 야호령 근처 오사보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제베가 이끈 몽골 좌익군이 우회해 이를 격파했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 군사는 전원이 남방에 있는 천혜의 요새 야호령으로 후퇴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의 대군이 무주를 유린하면서 야호령으로 육박하자 금나라의 최고사령관인 완안승유는<SPAN lang=EN-US> 40</SPAN>만의 정예군단을 이끌고 야호령으로 향했다<SPAN lang=EN-US>. </SPAN>그러자 야호령에서 몽골군은 두 군데로 공격을 감행하였다<SPAN lang=EN-US>. </SPAN>공격하기 전 제베는 몽골 돌격대를 모아놓고 몽골군이 금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초전부터 이들을 박살내는데 있다고 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징기즈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최전방의 결사대로서 죽음만이 그들의 영혼을 쉬게 해주는 고향이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먼저 몽골의 돌격대가 성난 파도처럼 금나라 군에 뛰어들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칼을 휘둘렀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군은 돌격하는 이들에게 불덩이 기름을 퍼부었다<SPAN lang=EN-US>. </SPAN>그렇지만 불을 끄려고 땅에 구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타고 있는 말들이 숯이 되어 넘어질 때까지 달리면서 싸우고 베었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말이 쓰러지자 맨 땅위에서 타 죽을 때까지 고통을 나타내거나 울부짖지도 않고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손으로 계속 칼을 휘둘러 살육하였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군은 두려움을 느껴 전열을 흩으려 뒤에 도착하는 우군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SPAN lang=EN-US> 금나라군은 </SPAN>대혼란을 일으켰고 그리고 이들은 뒤따라오는 몽골 기마병에게 짓밟히거나 죽임을 당하였다<SPAN lang=EN-US>. </SPAN>제베는 이들에게 질서있게 퇴각하여 재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철저히 궤멸시켰다<SPAN lang=EN-US>. </SPAN>살육전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금나라 군사들도 몽골군에게 놀라움을 갖게 되었다<SPAN lang=EN-US>. 이제 그들은 </SPAN>이전의 몽골군이 아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금나라는 다시 완안승유의 지휘하에 제<SPAN lang=EN-US>3</SPAN>의 천혜요새인 선평에 대군을 집결시켜 저항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해 무너졌다<SPAN lang=EN-US>. </SPAN>완안승유의 정예군과 몽골군은 회하보라는 곳에서 또다시 싸웠지만 금나라 정예군도 전멸되고 말았다<SPAN lang=EN-US>. </SPAN>회하보의 패전은 금나라에게 엄청난 공포를 가져다주었다<SPAN lang=EN-US>. </SPAN>다음의 목표는 몽골고원과 중국을 잇는 거용관으로 금나라는 이곳을 사수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이곳 거용관을 어떻게 통과해야할지 몰라 무슬림인 자파르를 불렀다<SPAN lang=EN-US>. </SPAN>자파르는 이 지방의 지리를 잘 알고있었다<SPAN lang=EN-US>. </SPAN>그는 빽빽한 숲 사이로 외길이 있어 그리로 국경을 통과할 수 있음을 알았으므로<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어둠을 틈타 말의 입에 제갈을 물리고 그의 안내에 따라 경계를 무사히 넘었다<SPAN lang=EN-US>. </SPAN>관문의 견고함을 믿고 안심하던 금나라 방위군은 잠든 사이에 급습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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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TRONG>금나라를 정복하다<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TRONG></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금나라는 몽골의 각 부족들을 그의 지배하에 두었는데 몽골의 강성을 두려워하여 분할지배 정책을 취했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는 몽골의 각 부족끼리 서로 싸우게 하고 가혹하게 약탈을 하였으며<SPAN lang=EN-US> 3</SPAN>년마다 몽골에 출병하여 각 지방을 순회하며 장정들을 죽여 없앴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금나라 정벌을 맹세했다<SPAN lang=EN-US>. <BR><BR></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lang=EN-US></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lang=EN-US>12</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세기 중반 금나라는 수도를 중국동북부에서 중도<SPAN lang=EN-US>(</SPAN>베이징<SPAN lang=EN-US>)</SPAN>로 옮겼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의 병제는<SPAN lang=EN-US> 300</SPAN>호를 모극<SPAN lang=EN-US>(</SPAN>무게<SPAN lang=EN-US>), 10</SPAN>모극을 맹안<SPAN lang=EN-US>(</SPAN>밍간<SPAN lang=EN-US>)</SPAN>으로 하는 맹안모극제로서 이들도 왕을 따라 중국 내부로 이주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 편제는 성인 남성들은 평시에는 농업 등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나면 징집돼 종군하게 되어있었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중국 대륙으로 이주한 후 여진족은 태만하고 나약해졌으며 생활도 눈에 띄게 궁핍해졌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 정부는 이런 처지에 빠진 여진인의 보호에만 치중하였기에 한인의 반발을 불러왔다<SPAN lang=EN-US>. 중국</SPAN> 내부에 정착한 여진족 무리는 중원의 풍요를 둘러싸고 내분과 부패를 일으키면서 만주 일대에 남은 무리들과 사이에 이질감을 낳았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징기즈칸이 금나라를 치려는 생각은 이전 토오릴에게 파견된 금나라 사신 야율아해를 만났을 때, 그로부터 '금나라는 무방비 상태로 사기가 떨어졌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징기즈칸과 의기가 투합하여 그곳에서 외교고문역을 맡았다<SPAN lang=EN-US>. </SPAN>야율아해는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에 능하였고 거란어<SPAN lang=EN-US>, </SPAN>여진어<SPAN lang=EN-US>, </SPAN>중국어 그리고 몽골어에도 능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귀순자와 거란인 망명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 시작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이들로부터 중국 사정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했지만 주로 금나라 내의 첩자들<SPAN lang=EN-US>, </SPAN>특히 무슬림 상인들이 가져다주는 정보에 무게를 두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 자신도 정보수집에 참가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공물을 인도한다는 명목으로 허실을 탐지하려 금나라에 갔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 측도 이를 경계하여 칸을 국내에 들이지 않고 국경 밖에서 접대하였다<SPAN lang=EN-US>. </SPAN>금나라에 대한 또 하나의 정보원은 금의 바로 북쪽에 접하며 살고있는 몽골계 옹구트족이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역사적으로 중국은 무한한 물자와 권위 등으로 유목민들을 유혹하였지만 대개는 변경 약탈전으로 끝났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 역시 금나라의 황제 알탄칸<SPAN lang=EN-US>(</SPAN>장종<SPAN lang=EN-US>)</SPAN>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조공을 바쳤으며 신하노릇을 하였다<SPAN lang=EN-US>. 1207</SPAN>년부터 징기즈칸은 금나라에 당당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SPAN lang=EN-US>. 1208</SPAN>년 마침 금나라의 알탄칸이 사망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후계자의 즉위에 맞춰 주종관계를 청산하려 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금나라 사신에게 새로운 군주가 누군가라고 묻고 사신이 위소왕(영제)이라고 하자 얼굴을 남쪽으로 돌리고 침을 뱉으며<SPAN lang=EN-US> “</SPAN>나는 중원의 황제는 천상의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들어왔는데<SPAN lang=EN-US>, </SPAN>이처럼 용렬한 자도 황제를 할 수 있다니 내 어찌 만날 수 있겠는가<SPAN lang=EN-US>” </SPAN>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때부터 몽골과 금나라 사이에는 본격적인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그 동안 중국에서 들어오던 물자를 직접 확보해야만 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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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STRONG>탕구트(서하)와의 전쟁<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TRONG></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징기즈칸은 칸이 되기 전부터 거란인<SPAN lang=EN-US>(</SPAN>키타이인<SPAN lang=EN-US>)</SPAN>이나 여진인 등<SPAN lang=EN-US>, </SPAN>금나라에서 이탈하여 온 사람들을 참모로 삼았다<SPAN lang=EN-US>. </SPAN>특히 거란<SPAN lang=EN-US>(</SPAN>키타이<SPAN lang=EN-US>)</SPAN>은 언어도 몽골과 비슷한 유목민으로서 웬만하면 중국어<SPAN lang=EN-US>, </SPAN>여진어 등<SPAN lang=EN-US>, </SPAN>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선배였다<SPAN lang=EN-US>. 그들은 </SPAN>테무진과 그의 몽골군의 미래가 불투명할 때부터 테무진을 따랐다<SPAN lang=EN-US>. </SPAN>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을 하나의 군주권 아래로 편입시켜 조직화와 내정정비를 일단 끝낸 <SPAN lang=EN-US>1206</SPAN>년에 징기즈칸은 대외전쟁에 나섰다<SPAN lang=EN-US>. </SPAN>그렇지 않으면 주변국가로부터 와해공작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다<SPAN lang=EN-US>. 더군다나</SPAN> 그의 군대는 피복속 부족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을 무조건 신임할 수도 없었다<SPAN lang=EN-US>. </SPAN>그들이 원래의 거주지에 머물러 있는 한 그만큼 더 위험하였다<SPAN lang=EN-US>. </SPAN>대외전쟁으로 유목민들의 전리품 획득의 기대에 부응하고 아울러 이제 막 통합된 국내를 전시체제로 완전히 통솔<SPAN lang=EN-US>, </SPAN>장악을 계속할 수 있어야 했다<SPAN lang=EN-US>. </SPAN>더구나 그 동안 끊임없는 전쟁과 기후변화로 가축의 수가 격감되어 몽골고원의 목축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그는 금나라를 공격하기 앞서 중국의 영하<SPAN lang=EN-US>, </SPAN>감숙<SPAN lang=EN-US>, </SPAN>오르도스<SPAN lang=EN-US>, </SPAN>신강 자치구 일부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탕구트(서하)를 공격하였다<SPAN lang=EN-US>. </SPAN>탕구트의 북쪽 경계는 고비사막의 남부에서 오아시스 도시인 하미에 이르기까지 몽골족이 살던 지역을 따라 그어져 있었다<SPAN lang=EN-US>. </SPAN>티베트계인 탕구트족은 그들의 지배를 받는 한족과 위그르족 등과 함께 서요를 구성하였으므로<SPAN lang=EN-US>, </SPAN>한족의 정착성향과 위그르의 유목기질이 절충된 사회구조를 유지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동안 탕구트는 사막과 초원<SPAN lang=EN-US>, </SPAN>그리고 농경지역을 바탕으로 요<SPAN lang=EN-US>, </SPAN>송<SPAN lang=EN-US>, </SPAN>금 사이에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며 발전해 왔고, 경계를 길게 맞댄 막북의 몽골과는 뚜렷한 충돌은 없었다<SPAN lang=EN-US>. </SPAN>그들은 수많은 가축을 쳤고 동서 교역로의 동쪽 끝에 위치하여 국가 재정의 대부분은 교역상의 이득 및 상거래에 부과되는 세에 의존하였다<SPAN lang=EN-US>. </SPAN>탕구트는 중국의 서북방에 있어서 유목민들이 공략하기 힘든 견고한 성곽도시들을 가지고 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징기즈칸은 내부적으로 제국의 기본틀을 조직화하면서 이 탕구트왕국(서하)을<SPAN lang=EN-US> 1205</SPAN>년<SPAN lang=EN-US>, 1207</SPAN>년<SPAN lang=EN-US>, 1209</SPAN>년의 세 차례에 걸쳐 침입하였다<SPAN lang=EN-US>. </SPAN>쿠릴타이가 열리기 전인<SPAN lang=EN-US> 1205</SPAN>년 야율아해 지휘하의 몽골군이 탕구트 영토를 처음으로 공격하여 낙타를 비롯한 많은 가축을 빼앗아 돌아왔다<SPAN lang=EN-US>. </SPAN>두 번째는<SPAN lang=EN-US> 1207</SPAN>년 가을로서 그들은 올로하이를 함락하여 많은 말<SPAN lang=EN-US>, </SPAN>낙타<SPAN lang=EN-US>, </SPAN>재물 등을 약탈하고 그곳의 직업적 기술자나 농민들을 잡아 유목지대로 강제 이주시켰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탕구트가 군사를 규합하자<SPAN lang=EN-US> 1208</SPAN>년 초여름의 더위를 피하여 되돌아왔다<SPAN lang=EN-US>. </SPAN>이 두 번의 공격은 아직 본격적인 정복전쟁이라기보다는 약탈 정보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당시 서방에는 서요나 호라즘샤가 버티고 있고 남쪽에는 몽골족의 발전을 막아온 동아시아 제<SPAN lang=EN-US>1</SPAN>의 강국 금나라가 있었다<SPAN lang=EN-US>. </SPAN>몽골국이 웅비하려면 이들과의 결전을 피할 수 없었고 이를 위해 탕구트를 제편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SPAN lang=EN-US>. </SPAN>또 탕구트의 좋은 말과 낙타<SPAN lang=EN-US>, </SPAN>이름 높은 활과 검<SPAN lang=EN-US>, </SPAN>갑주 역시 탕구트의 기병만큼 몽골에 필요했다<SPAN lang=EN-US>. </SPAN>탕구트를 손에 넣으면 비단길을 통한 동서교역의 이익을 나눌 수 있었고<SPAN lang=EN-US>, </SPAN>무엇보다 중원과 서역으로 진출하는 안전한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SPAN lang=EN-US>. </SPAN>두 번에 걸쳐 탕구트의 허실을 탐색한 몽골군은<SPAN lang=EN-US> 1209</SPAN>년<SPAN lang=EN-US> 4</SPAN>월 후방공격을 차단하고 금나라에 대한 원정로를 확보하는데 목적을 두고 탕구트를 침략하였다<SPAN lang=EN-US>. 징</SPAN>기즈칸은 중국을 나누고있는 세 나라 가운데 가장 약한 이웃인 탕구트를 공격하여 정착민에 대한 몽골군의 전투력을 시험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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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 lang=EN-US><o: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B style="mso-bidi-font-weight: 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샤먼(무당)에 대한 군주권의 우위 확보<BR><BR><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B></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몽골인들의 세계에서 샤먼<SPAN lang=EN-US>(</SPAN>무당<SPAN lang=EN-US>)</SPAN>의 권위는 부족 수령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였다<SPAN lang=EN-US>. </SPAN>몽골인들은 중요한 문제를 그들과 상의하고 그들의 충고를 따랐다<SPAN lang=EN-US>. </SPAN>그들이 퍼뜨리는 이야기는 부족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SPAN lang=EN-US>. </SPAN>그 당시 몽릭의 아들 코코추가 샤먼으로 대단한 권위를 행사하였는데 평민들은 그가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영혼과 대화한다고 믿었다<SPAN lang=EN-US>. </SPAN>언젠가 그는 몽골고원에 흔히 찾아오는 매서운 추위에 벌거벗은 몸으로 황야와 산 속을 헤매다가 돌아와<SPAN lang=EN-US> “</SPAN>하늘이 나에게 말하기를 땅위의 모든 것을 테무진과 그의 자식들에게 주었으며 그를 징기즈칸이라 부르라<SPAN lang=EN-US>”</SPAN>고 하였다고 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그러한 이야기가 샤머니즘적인 몽골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고 코코추를 신임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코코추의 아버지인 몽릭은 과부인 징기즈칸의 어머니 호엘룬 에케와 내연의 관계에 있었다<SPAN lang=EN-US>. </SPAN>코코추는 자신의 주술능력과 자기 아버지의 위치로 자신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여겼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이 시행한<SPAN lang=EN-US> 1206</SPAN>년의 여러 조치에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코코추의 주변에 모이기 시작하자 그는 초자연적인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우선 징기즈칸의 집안에 불화를 일으켰다<SPAN lang=EN-US>. </SPAN>그는 조치 카사르에 대한 징기즈칸의 의심을 부추겨 조치 카사르를 치게 함으로써 칸의 권위에 손상을 주려 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 mso-bidi-font-family: Arial">징기즈칸과 카사르와의 불화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은 그를 의심할 만하였다<SPAN lang=EN-US>. </SPAN>일찍이 바야우트씨족 출신의 사람이 초원의 왕자가 될 만한 후보자로 사차 베키<SPAN lang=EN-US>, </SPAN>자무카<SPAN lang=EN-US>, </SPAN>그리고 타타르족의 알락 위드르 외에 카사르도 꼽았었다<SPAN lang=EN-US>. </SPAN>케레이트의 토오릴과 싸울때도 카사르는 자기 처자식을 토오릴에게 남겨두었었다<SPAN lang=EN-US>. </SPAN>또 카사르는 여러 번 형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SPAN lang=EN-US>. </SPAN>콩기라트족이 화친하려 왔을 때 카사르가 그들을 덮치는 바람에 그들이 자무카와 연합하게 된 일도 있었으며 타타르와 싸운 후 징기즈칸은 포로<SPAN lang=EN-US> 1</SPAN>천명을 모두 죽이라고 하였음에도 그는 자기 타타르족 부인의 말대로 일부를 살려주었었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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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독자적으로 전략을 구사하면서 상대방 군대를 혼란에 빠뜨린 후 힘을 모아 생각지도 못한 반격을 가하는 끈질긴 투지가 몽골군에게는 몸에 배여 있었다<SPAN lang=EN-US>. </SPAN>또 싸우기 전 척후대를 보내 지형과 정세를 사전에 확보하여 일사분란한 작전을 펼치는 치밀함이 있었다<SPAN lang=EN-US>. </SPAN>또 몽골군은 일주일 동안 먹지도 않고<SPAN lang=EN-US>, </SPAN>자지도 않고<SPAN lang=EN-US>, </SPAN>쉬지도 않고 말을 달려 적을 분쇄하기도 하였다<SPAN lang=EN-US>. 1206</SPAN>년 징기즈칸의 즉위 후 군사훈련 중에는<SPAN lang=EN-US> 6</SPAN>일간의 고비사막의 강행군이 들어 있었다<SPAN lang=EN-US>. </SPAN>행군 동안 모든 음식물들이 거두어 들여졌고 다만 물만이 배급되었다<SPAN lang=EN-US>. </SPAN>휴식은 첫날에는<SPAN lang=EN-US> 6</SPAN>시간<SPAN lang=EN-US>, </SPAN>둘째 날에는<SPAN lang=EN-US> 5</SPAN>시간, 이런 식으로 줄여져<SPAN lang=EN-US> 6</SPAN>일째에는<SPAN lang=EN-US> 1</SPAN>시간으로 되었다<SPAN lang=EN-US>. 7</SPAN>일째에는 하루종일 공격과 포위훈련이 열렸고, 그리고 이를 견딘 자들만 천호대에 배속시켰다<SPAN lang=EN-US>. 이</SPAN>들은 적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다른 군사에게는 공손하여 부대의 핵심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의 독특한 점은 단순히 개인의 용맹이나 기교에 의존하기 보다 대규모 작전을 전령을 사용하거나 특별한 신호화살을 통하여 조정할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SPAN lang=EN-US>. 이들의 </SPAN>군사적이기 보다 논리적인 능숙함은 연례 사냥대회 같은 대규모 훈련에서 얻어졌다<SPAN lang=EN-US>. 이</SPAN>것이 때로는 일사분란한 움직임으로 때로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졌다<SPAN lang=EN-US>.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징기즈칸은 병사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서 충성심을 이끌어냈다<SPAN lang=EN-US>. </SPAN>그는 장교들에게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도록 하는 등 평등한 생활을 요구하였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의 생활도 병사들과 거의 같았다<SPAN lang=EN-US>. “</SPAN>나는 야만적인 북쪽출신으로 소치기와 말치기와 같은 의복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SPAN lang=EN-US>. </SPAN>우리는 같이 희생하고 부를 같이 나눈다<SPAN lang=EN-US>. </SPAN>나는 이 나라를 신생아로 보고 병사들을 친형제처럼 돌본다<SPAN lang=EN-US>.” <BR><BR></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SPAN lang=EN-US></SPAN>징기즈칸의 군대는 철저하게 평등한 집단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의 지도력과 보호하에서 몽골 기마병은 유라시아 대부분을 휩쓸었으며 그 절정기에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들 개개인도 중국이나 러시아<SPAN lang=EN-US>, </SPAN>페르시아<SPAN lang=EN-US>, </SPAN>그리고 서방 유럽이 소집한 적군에 비교하여 매우 우수하였다<SPAN lang=EN-US>. </SPAN><SPAN lang=EN-US>1204</SPAN>년 나이만족에 대한 승리에서부터<SPAN lang=EN-US> 1209</SPAN>년 탕구트에 대한 원정이 있을 때까지의 기간이 징기즈칸이 전쟁 대신 제국의 조직을 닦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SPAN lang=EN-US>. 이</SPAN> 기간에 제국의 내적인 완성을 위한 기초와 대칸 일족의 권위가 확립되었고, 장군들에게는 전쟁 지휘권이 부여되었다<SPAN lang=EN-US>. <BR><BR><?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몽골에서는 매년 가을 소를 잡아 뼈를 발라낸 뒤 고기를 세로로 길게 자른다<SPAN lang=EN-US>. </SPAN>이 고기를<SPAN lang=EN-US> 3~4</SPAN>개월 이상 건조한 창고 등에서 바싹 말린 후 가루로 빻은 것이<SPAN lang=EN-US> </SPAN>보르츠이다<SPAN lang=EN-US>. </SPAN>소 방광 하나에 한마리 분량의 고기가루가 들어가지만 무게는<SPAN lang=EN-US> 3~4 kg</SPAN>에 불과하다<SPAN lang=EN-US>. </SPAN>몽골군은 보르츠를 가득넣은 소 방광을 한 사람에 두 개씩 휴대해 다니다가 더운물에 보르츠를 조금씩 풀어 마시면서 식사를 해결하였다<SPAN lang=EN-US>. <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천호의 재편과 천인대장의 임명 후 징기즈칸은 황금씨족에게 부민을 나누었다<SPAN lang=EN-US>. </SPAN>세 명의 아들<SPAN lang=EN-US>, </SPAN>주치<SPAN lang=EN-US>, </SPAN>차가타이<SPAN lang=EN-US>, </SPAN>오고타이에게 각각<SPAN lang=EN-US> 4</SPAN>개의 천호를 나누어주고 제국의 서방 알타이산 방면에 배치하여 우익 울루스를 만들었으며<SPAN lang=EN-US>, </SPAN>또 세 명의 친동생<SPAN lang=EN-US>, </SPAN>조치 카사르<SPAN lang=EN-US>, </SPAN>카치운<SPAN lang=EN-US>, </SPAN>테무게 옷치긴에게는 각각<SPAN lang=EN-US> 1</SPAN>개<SPAN lang=EN-US>, 3</SPAN>개<SPAN lang=EN-US>, 8</SPAN>개의 천호를 주어 고원동방의 경계인 흥안령 방면에 두어 좌익 울루스를 만들었다<SPAN lang=EN-US>. </SPAN>이 동서 여섯 왕가의 중앙에 징기즈칸과 그의 막내아들 톨루이가 있었는데 중앙의 징기즈칸 직속 천호군도 서쪽으로 보오르추<SPAN lang=EN-US>, </SPAN>동쪽으로 무칼리라는<SPAN lang=EN-US> 2</SPAN>명의 노장을 중심으로 다시 우익<SPAN lang=EN-US>, </SPAN>좌익의 형태로 나누어 배치하였다<SPAN lang=EN-US>. </SPAN>중군은 바아린의 나야아가 지휘하였으며 입양아인 탕구트인 차가안이 선발된<SPAN lang=EN-US> 천</SPAN>명을 지휘하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굴림; COLOR: black; FONT-SIZE: 9pt">결국 징기즈칸은 남쪽을 향해 가장 바깥쪽에 좌우<SPAN lang=EN-US> 3</SPAN>개씩의 일족왕가<SPAN lang=EN-US>, </SPAN>그의 안쪽에 또한 좌우의 천호군 그리고 정중앙에 징기즈칸 자신과<SPAN lang=EN-US> 4</SPAN>개의 오르도를 지키는 케식텐이 있어<SPAN lang=EN-US>, </SPAN>학이 좌우의 날개를 크게 벌린 것 같은 형태로 남쪽을 향하여 배치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 대형은 왼쪽으로 중국<SPAN lang=EN-US>, </SPAN>가운데는 투르키스탄과 동부이란<SPAN lang=EN-US>, </SPAN>오른쪽으로 러시아 초원을 향했다<SPAN lang=EN-US>. </SPAN>징기즈칸이 사망했을 때 몽골군의 실제 병력은<SPAN lang=EN-US> 12</SPAN>만<SPAN lang=EN-US>9천</SPAN>명이었다<SPAN lang=EN-US>. </SPAN>이중 좌익에<SPAN lang=EN-US> 6</SPAN>만<SPAN lang=EN-US>2천</SPAN>명<SPAN lang=EN-US>, </SPAN>우익에<SPAN lang=EN-US> 3</SPAN>만<SPAN lang=EN-US>8천</SPAN>명이 배치되었으며<SPAN lang=EN-US>, </SPAN>나머지는 중군과 보충대였다<SPAN lang=EN-US>.<BR><BR><o:p></o:p></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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