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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과 몽골제국(蒙古帝國) - 39
 작성자 : 관리자 2011.03.11 17:44:58, 조회 1,664 

 

징기즈칸의 사후


징기즈칸이 1227년에 사망했을 때, 몽골족의 총병력은 고작 12만9천 명에 불과했다. 유목민족의 관점에서는 대병력이었지만 중국의 한족에 비해서는 미미한 숫자였다. 또한 인구 전체로도 몽골족은 약 1백만에서 2백만 가량으로 추정되지만 한족은 2천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병은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역량을 과시했다.


그가 죽었을 때, 분할상속의 부족풍속을 따라 몽골제국은 4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 각 지역은 왕이란 뜻의 ‘칸(汗)’을 세우고 독자적인 통치권을 형성했다. 이러한 분열상은 거대한 몽골제국이 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는 원인이 됐다. 우선 종교적으로 몽골제국의 칸들은 분열상을 보였다. 중국의 황실인 원(元)은 불교를 수용했으나 일부 한국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징기즈칸에 의해 시작된 중국의 통일과업은 마침내 그의 손자 쿠빌라이(1215~1294년)에 의해 완성되었다. 1279년 중국 남부를 장악했던 한족 왕조인 남송을 무찌르고, 몽골제국이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몽골족은 남송을 격파하기에 앞서 1271년 원(元)을 세웠다. 지금의 북경에 대도(大都)라는 명칭의 수도를 세우고 본격적인 중국 지배에 들어갔다. 원은 1368년 명(明)에 의해 붕괴될 때까지 중국을 약 1세기에 걸쳐 통치했다.


몽골족에 의한 중국의 재통일은 중국사에 몇 가지 의미를 부여했다. 우선 끊임없는 이민족 침입으로 야기된 장기간의 전란이 끝남으로써 중국의 사회와 경제가 모처럼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중국의 영향력이 북으로는 북극해까지 남으로는 해남도(海南島)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중국이 다민족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준비되었다. 그리하여 한족은 물론 몽골족, 거란족, 위그르족, 장족, 여진족 등, 다양한 민족이 하나의 정치체제에서 더불어 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종족이 출현하기도 했다. 탕구스족과 아랍인과의 잦은 접촉으로 새로운 민족인 회족(또는 ‘回回人, 회회인’이라 불리움)이 나타난 것이 그 예다. 이들은 중국 서북부와 중원지대에 정착했다.

소수민족인 몽골족은 정복을 끝내자마자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과 융합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때부터 이민족들이 채택한 이중행정 구조를 설치했다. 모든 행정기관의 수장은 몽골인이 차지하는 대신에 그 밑의 관직에는 한족 출신을 대폭 등용시켰다. 또한 유교를 국교로 복귀시키고 과거제를 부활하여 한인 지배층에 대한 회유책을 펼쳤다. 그러나 한인 지배층에 대한 타협안은 그들의 경제적 기반인 지주경제에 대해 정복왕조가 일체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절정에 올랐다.


이러한 몽골족의 융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복왕조 원(元)제국사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몽골족은 일종의 카스트제도와 같은 인종차별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다수민족인 한족의 불만을 크게 샀다. 즉 그들 자신을 최정상에, 주로 서역계통의 이민족인 이른바 ‘색목인’을 두 번째로, 그리고 몽골제국에 먼저 복속한 북부지방의 한족을 세 번째로, 최후까지 저항한 남송지역의 한족을 최하위로 분류했다.


징기즈칸의 활약으로 중국제국은 멀리는 동유럽까지 그 위세를 크게 떨쳤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 거대한 다민족국가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물론 이후 정복자들도 민족간의 내부적 갈등을 완전히 해소시키지 못했으며, 그 분쟁의 씨앗은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국대륙에 존재하고 있다.



출처 : 석조건물 문화유산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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